2022년이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한 해가 시작하면서 세운 계획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독서”입니다. 올해는 반드시 책 몇 권을 읽으리라 다짐합니다. 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추천도서를 검색합니다. 몇 권 주문도 합니다. 그런데 참 작심삼일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책을 펼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가 영 녹록지 않습니다. 책이 좋다는 것은 너무 잘 압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책을 강조하고 있고 변화하는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책이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을 펼칩니다. 책을 펼쳤는데 어느새 책은 허벅지를 데우는 담요로 전락하고 내 눈과 손은 핸드폰을 향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싶지만 책을 읽기가 쉽지 않은 우리,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님이 쓰신 책 [정신과 의사의 서재]에서 책 읽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 봅니다.
“항상 바빠 보이시는데, 책은 언제 보세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약간 부끄러운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솔직히 많이 읽는 편이기는 하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책, 그냥 보고 싶어서 읽는 책, 호기심에 들춰보는 책, 시리즈 신간이 나와서 의무감에 보는 책까지 내가 책을 읽을 이유는 많다. 책을 언제 보느냐는 이 질문에 나는 단순하게 ‘언제 어디서나’라고 대답하고 싶다. 책 읽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공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대신에 내 생활 패턴에 맞추어 적재적소에 읽기 좋은 책을 깔아 놓는다.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알맞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세팅’을 해놓는 것이다.
우선 직접 구입하거나 여러 이유로 입수한 책 무더기를 먼저 책상 왼쪽 위에 한 줄 혹은 두 줄로 쌓는다. 이때 책을 분류하지 않고 그냥 올려놓기만 한다. 그러고 나서 상황이나 시간에 따라 눈이 가는 대로 골라 읽는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라서 오전 시간에 머리가 가장 맑고 기민하게 돌아간다. 그래서 오전에는 책상에 앉아서 주로 정신분석, 인문사회, 과학책과 같이 집중해야 하는 책을 읽는다. 노트북을 켜고 핸드폰도 옆에 두고, 펜을 손에 든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줄을 긋고, 참고문헌을 찾고, 생각나는 부분을 메모하거나, 해당 페이지의 사진을 찍기도 한다.
소파에 앉아서 편한 자세로 볼 때는 소설이나 에세이가 좋다. 새로 들어온 책 중 두 권은 소파 근처에 놓아두고 오다가다 읽는다. 화장실에는 주로 신간보다는 여러 번 읽어 익숙한 만화책을 두 권정도 비치해둔다. 새로운 만화에 몰입한 나머지 지나치게 오래 화장실에 머무는 것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침대 옆에는 낮게 책장을 짜 놓았다. 여기에는 소설이나 에세이 중에서도 이미 읽었거나, 친숙한 작가의 신간을 둔다. 자기 전에 보는 책은 이미 읽은 책이거나, 처음 보더라도 아는 작가의 책을 선호한다. 낯선 감정이나 텍스트의 흐름에 놀라서 잠이 달아나서는 안된다.
연구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책을 배치하는데, 전공서적에 가까울수록 연구실에, 사적인 즐거움이나 집필 자료로 보는 책은 집에 보관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이렇게 배치해놓으면 언제 어디서든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을 수 있다. 적절한 책을 미끼같이 투척해놓는 것이 다독의 길에서는 필수사항이다.
이 부분을 발췌한 이유는 제가 책을 읽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제가 읽은 책을 쭉 세어봤더니 대략 100여 권정도 읽었고 책 서평은 70권 정도 적었네요. 스스로가 약간의 활자 중독자로서 모습이 있긴 하지만 다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손 닿는 곳에 책이 늘 놓여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머무르는 모든 곳에 책이 있습니다. 집 소파에는 [하루 10분 인문학] 책이 있고, 침대 옆에는 [일의 격]이 있고요. 병원에서도 연구실에는 [유대인 이야기]가 있고, 진료실에는 [착각의 쓸모]라는 책이 컴퓨터 옆에 꽂혀있습니다. 책을 들고 다니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산병원 전자도서관 앱을 잘 이용합니다. 베스트셀러인데 선뜻 사고 싶지는 않은 책이라던가 읽기 가벼운 책들은 전자도서관 자료를 이용합니다.
재미있는 책은 하루 만에 다 읽어버리기도 하고, 어려운 책이나 진료실 옆에 꽂혀 있는 책은 오래 그 자리를 지키기도 하지만 대개 1주일에 한 번씩은 새 책으로 대체가 됩니다. 하지현 교수님과 제가 다른 점은 한 달에 한 번 대량으로 책을 구매한 뒤 쌓아놓고 배치하고 읽으신다는데, 저는 책의 “신선도”를 중시해서 읽고 싶은 책을 한 번에 하나씩 구매해서 새 책의 신선도가 사라지기 전에 대부분 읽습니다. 그리고는 또 열심히 주문하지요.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는 것은 시스템입니다.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매우 강력하기도 하지만 또 매우 나약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에 의존한 계획은 대개 좌절을 남기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의지를 시스템으로 전환해두면 유지하기가 수월해집니다. 독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핸드폰을 보는 것보다 책을 보는 것은 뇌를 많이 써야 하기 때문에 힘든데 책을 고르고 펴는 과정까지가 번거롭다면 대부분 책을 읽을 의지를 상실해버리겠지요. 그래서 책을 곳곳에 둡니다. 내가 책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기 전에 바로 집어 들 수 있게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추가 팁이 있습니다. 저는 대개 1주일 정도면 책들을 교체를 합니다. 1주일 동안 읽지 못한 책이라면 더 이상 붙잡고 있어도 그 책을 읽을 확률은 떨어집니다. 책이란 나 몇 권 있었어. 나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었어. 하는 자랑 용도로 읽는 것은 아닙니다. 바쁜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언가 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든, 도움을 받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읽히는 책을 계속 잡고 있는다고 해서 그 통찰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간신히 생긴 의지를 꺼뜨리기가 더 쉽지요. 그래서 과감히 안 읽히는 책은 덮으라 말씀드립니다. 1주일 정도 책에 기회를 줬는데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그 책과 나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책을 다 못 읽는 것은 꼭 독자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저자의 책임도 일부 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죄책감은 넣어두시고 새로운 책을 펼치세요. 세상은 넓고 책은 많습니다. 꼭 그 책이 아니더라도 읽어야 할, 내게 도움이 되는 책은 많습니다.
코로나와 함께 한지 벌써 3년째로 들어섭니다. 처음 이 바이러스를 만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함께 할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참 슬픈 일입니다. 바야흐로 재난의 시대입니다. 재난의 시대이므로 사람들은 이 불확실한 고통과 불안을 견디는 지혜를 갈망합니다. 지혜의 저장고는 아무리 많은 매체가 쏟아져 나온다 해도 결국은 “책”입니다. 책이란 정보와 지식도 주지만 무엇보다도 시선을 바꾸어줍니다. 나의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더 넓고 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시선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