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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탓 May 11. 2022

또 가처분 신청과 소송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둘러앉은 참여자 중 K어집을 운영하는 부모협동조합의 이사장이 물었다. 며칠 전 도착한 공사 중지 가처분 신청 때문에 긴급하게 모였다.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K어집의 다른 조합원들은 가처분 신청에 어집공사가 잘못될까 걱정을 하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보통은 내향적인 성격 탓에 갈등을 회피하는 나는, 불안해 하는 어집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하게도 내 속에서 전투력이 커지는 걸 느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내게 도착한 P의 선물은 '건축공사금지 가처분 신청' 통지서로, S의 가처분 신청을 송달받기 3주 전이었다. 따뜻한 초겨울 날씨가 계속 공사를 돕고 있어 모두가 안심하면서 이번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까 즐거운 상상을 하던 차였다.


이럴 조짐은 진작에 있었다. 나는 서울시가 그 해 처음으로 시행하는 '서울형 공동체 주택 지원사업'에 참여해서 선정된 세 곳 중 하나였고, P는 사업에서 이탈하기 전에 건축을 같이 준비하면서 그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P는 사업에서 이탈한 뒤 지원 사업 심사가 이루어질 때 서울시에 직접 민원을 넣었고, 담당부서는 그 민원을 이유로 내가 선정되었으나 지원을 보류했다. 공무원들이 피곤해한다는 '행정감사'에서 지적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P가 자신의 분담금을 돌려받으려면 내게 언제까지 돌려달라고 하면 된다. 직선거리 50미터 거리에 가깝게 살고 있어서 쉽게 만날 수 있고, 오가다가 마주치기도 해서 그가 내게 뭔가를 전달하는 방법은 참 많았다. 그런데 그는 내게 분담금을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서울시와 법원에 '돌려받지 않은 분담금이 있다.'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 정작 당사자인 내게는 그 말을 하지 않고, 내 연락을 받지도 않는다.


나는 믿을만한 두 변호사를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말을 부탁했다.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변호사 B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건축허가에 문제가 없으면 가처분 신청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안심하며 한숨을 쉬었다. 공사가 중지될 가능성은 낮다는 소리를 듣고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시간이 몇 초 정도는 됐다. 그다음 말은 다시 내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이럴 때 급한 마음에 돌려줄 돈의 일부를, 작은 돈이라도 먼저 주시면 안 돼요. 그렇게 시작하면 소송에서 불리해지고, 그쪽이 달라는 액수가 계속 바뀌고 불어날 수 있습니다."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이건 또 무슨 소리?'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분담금을 돌려주려는 거잖아요. 그건 선생님 입장입니다. 상대방은 선생님의 입장을 이용할 거예요. 얼마를 받겠다고 확정해서 의사를 전달해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B는 상대방이 받을 돈 얼마를 언제까지 달라고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많은 돈을 받고 싶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상대방이 그런 의사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돈의 일부를 건넨다는 것은, 내가 더 불리해지고 결국 내가 돌려줄 돈보다 더 많은 걸 주게 될 거라는 거다.


"언젠가 상대방은 소송을 걸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리다가 소송에서 돌려줄 돈이 확정되면 그때 법원에 공탁을 하세요. 직접 주시면 안 되고 공탁을 하셔야 합니다. 더 중요한 건 그 전에는 절대 돈을 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을 때 면허증을 먼저 상대방에게 건네주지 말라는 말과 비슷하다. 먼저 면허증을 주는 행위가 주는 사람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된단다. 싸움의 기술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가장 쉽게 자신의 분담금을 돌려받는 방법은 내가 서울시의 지원 사업에 따라 건축을 진행하는 경우이고, 한 두 달 안에 다 끝나는 절차이다. 그런데 그는 서울시의 그 지원이 안되도록 민원을 넣어서 막아 놓고는, 법원에 이 공사를 중지시켜달라고 가처분 신청을 했다.


하아, 돈의 주인에게 빌린 돈을 돌려주기도 힘든 세상이다. 나는 돈보다 돈에 대한 사람의 심리와 생각과 행동이 참으로 묘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만난 다른 변호사 K는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설명을 내게 해주었다.


"그분은 반환금 청구 소송을  거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낼 거예요. 확실해요. 그때 돈을 주시면 돼요. 글구 제가 서울시 공익소송 지원 활동을 해서  아는데, 행정감사라는 말을 담당자가  그건  퍼센트 시의원을 통해서 민원을 넣은 거예요."


공사 현장 때문에 몸과 머리가 지쳐있던 나는, 그가 보내온 내용증명과 가처분 신청서를 다시 읽으면서 두 변호사의 도움말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지나쳤던 부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B의 말대로 그가 보내온 모든 문서에 언제까지 얼마를 달라는 문구가 없고, 집짓기 사업을 중지하라는 주장만 있다.


공정 단계에서, 현장에서, 민원에서 예상 못한 변수가 생겨나고, 이렇게 소송을 당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서울에서 넉넉한 기간과 자금도 없으면서 집을 짓는 건축주는 죄인이 된다!


따스해서 겨울바다 구경을 하러 여행하기 좋았던 그 겨울, 나는 연말연시를 가처분 신청에 대한 답변서를 준비하면서 보냈다. 답변서에는 실제 있었던 P와 헤어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담았고, 그 자리에 없었던 제삼자인 판사가 보기에 필요할 법한 내용을 위주로 넣었다. 답변서에 참고 자료로 헤어지기로 결정한 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진술서를 첨부했다.


담당 판사의 결정은 합리적이었고 B 변호사의 예상대로였다. 판사는 분담금을 돌려받지 않아서 분쟁이 생긴 것으로 보이나, 그것이 공사를 중지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며 P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P도 S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자 조금 있다가는 분담금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이번에는 교회가 내는 임차료 연 3천만 원과 매달 8백만 원 정도의 이자를 지급하라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역시 두 변호사가 예상한 그대로의 흐름이었고, 금액이 더 올라갔다.


변호사들로부터 예방주사를 맞았던 나는 그의 소송에 크게 놀라지 않았고, 미리 준비도 해 둘 수 있었다. P는 겉보기에 자신이 냈던 분담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가 노리는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당시 나는 은행으로부터 대지 구입비용의 절반 가량을 대출받은 상태였고, 공사가 시작되어 건축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추가 대출을 받아야 했다. 어느 금융기관으로부터 받을지 고민하다가 신용협동조합을 선택했다. 변호사들의 조언으로 볼 때 P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없었고, 불확실성이 있을 때에는 이자를 낮추는 것보다 금융기관과의 관계와 신뢰가 중요하다. 비용보다는 안정이 우선이다. 은행보다 연리 1% 이상 높은 제2금융권 신협으로 갈아타며 은행에 대출금을 상환하고 신협에서 건축자금을 대출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P는 공사 중인 집터에 가압류를 걸었다. 그에게 소송은 가압류를 하기 위한 절차였고, 소장을 근거로 가압류를 신청했다. 담보물에 가압류가 설정되면, 아는 사람만 아는 변화가 생긴다. 담보물인 집터는 금융기관에서 정상 물건에서 제한물건으로 바뀌어 분류되며, 추가 대출이 불가능해진다. P는 건축자금을 조이고 있는 것이다. 이 기간이 길어지면 금융기관은 부실화할 위험이 있는 대출을 '정상화' 하기 위해 가압류를 해제하거나 대출금을 상환할 것을 요구하고, 요구가 이행되지 않으면 강제 집행에 들어간다. 소위 말하는 경매 처리다.


그가 공사의 건축자금을 조여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 목표는 이 집 짓기를 완성하는 것 하나였고, 나는 거기에 집중했다.


공사 막바지에 약간의 자금 압박이 있었지만, P가 가압류를 설정했을 즈음 공사는 따뜻한 겨울 날씨 덕에 큰 문제없이 진행되어 4층 바닥까지 골조 공사가 끝났고, 조금 더 지나서는 5층과 6층 옥상까지 골조가 섰다. 그 뒤로는 창호공사와 조적공사가 이어졌고, 집은 새 옷을 입고 가림막을 벗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건축자금을 조달한 방법 중 하나는 참여자의 분담금과 참여자들 지인의 대출금이었다. 참여자들마다 시기별로 할당된 분담금을 모두 다르게 내고 있었고, 부족하거나 초과한 분담금에 대해서는 쉬운 기준을 적용했다. A가 자신이 내야 할 분담금보다 1억 원을 더 냈으면 초과한 부분에 대한 이자를 A에게 연리 2%로 계산해서 지급했고, 참여자 이외의 사람들에게서 조달한 자금에 대해서는 연리 2.5%의 이자를 주었다. 돈을 빌려준 사람 중 담보 설정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근저당을 설정했다. 반대로 분담금을 덜 낸 참여자는 자신이 덜 낸 만큼에 해당하는 이자를 내면 된다.


P는 분담금을 초과해서 낸 두 참여자 중 하나였고, 사업에서 이탈하기 전까지 매달 연리 2.0%의 이자를 지급받았다. 그가 이탈한 뒤 나는 연리 2.5%의 이자를 그에게 지급했고, 그다음 해 소송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입금했다. 이 단순한 계산과 이자 지급은 P와의 소송에서 내게 아주 유리하게 작동했다.


소송은 일 년을 끌었다. 판사는 여러 참여자가 모여 만장일치로 결정했던 과정과 결과를 그대로 인정해서, 판결일까지는 연리 2.5%의 이자를, 판결일부터 갚는 날까지는 연리 12%의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P가 청구한 교회의 월임차료 3천만 원과 추가 이자는 기각됐다. 나는 판결이 나기 몇 개월 전에 공탁금을 법원에 예치했기 때문에 더 주어야 할 돈은 없었고, 오히려 공탁금의 일부를 반환받을 수 있었다.


과정을 무시하고 자금 조달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P는 공사기간 내내, 그리고 공사가 끝난 뒤에도 상당 기간 연리 2.5%의 우호적인 금리로 7억여 원의 자금을 대출해 준 전주 역할을 했다. 복잡하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점에서는 내게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집 짓기를 할 때에는, 플랜 B나 플랜 C로 부족하고 플랜 D와 플랜 F까지 안전판을 마련하는 게 좋다. 건축주가 넉넉한 시간과 여유자금을 가지고 있다면 조금은 더 느긋하게 플랜 B와 플랜 C로 충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톰 크루즈처럼 불가능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특수요원이라면 아무 걱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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