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옛골소년 Jun 26. 2020

새로운 친구 추천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알림음 소리에 핸드폰을 수시로 열어본다. 종류를 불문하고 수신되는 문자음은 '잘 있니'라며 존재감을 물어보는 노크 소리로 들린다. 그런 알림음 중 유독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 '새로운 친구 추천이 있습니다: ○○○님', 잠시 잊고 지내던 사람의 이름이 반갑게 불쑥 튀어나온다.

 반면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알고 있는 사람이 친구로 추천되기도 한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왜 나에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추천해 줄까', '어떤 로직으로 친구를 알려주는 것일까'.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기도 했다. SNS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연결된'이라는 것에 기분이 묘하다.

 '혹시 아는 사람이니?, 모르더라도 알고 지내면 좋지 않겠니?'라는 의미인 양 친구 추천을 해준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인간관계를 다시이어주기라도 하듯, 사람이 사람을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니라 SNS가 사람을 소개해 주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바둑을 인공지능에게 지는 것처럼 달갑지 않은 기분이다. 관계란 그리 쉽게 이루어지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름과 얼굴이 친구 추천으로 대뜸 튀어나올 때면..., '나는 너를 몹시 괴롭혔던 지난날을 기억하는데,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라며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직장에서 한참을 같이 일했던 오래전 팀장의 사진과 함께 친구 추전 알림이 왔고, 사무실 바닥에 도배지 바르는 일을 하는, 말도 안 되는 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 왜 지금..., 이 얼굴을 보여 주는 거야', 심지어 그때의 모습 그대로 있었다. 너무 우려먹는 건 아닌지, 사진이라도 세월과 같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조금의 측은한 마음이라도 생겼을 텐데,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웃고 있는 반가움보다는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한 손에는 빨강 팬을 들고 있을 듯한 끔찍한 모습이 떠올랐다.

 힘들게 작성한 문서에 빨갛게 색이 입혀지며 오답 체크당하는 기분은 참담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점수로 채점당하는 삶은 끝날 줄 알았는데 자의든 타의 든 평가는 죽을 때까지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빨간 팬은 어디를 가나 무한 반복적인 첨삭지도의 훌륭한 도구였다.

 흑백 프린터에서 튀어나온 나의 순수 창작물을 빨간색으로 물들이는 예술혼을 펼칠 때 무척 행복해했던 팀장의 얼굴은 SNS로 대뜸 튀어나온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한창 첨삭지도를 당할 때, 붉은색은 축구 국가대표님 유니폼에나 어울리는 색이지, A4용지를 캔버스 삼아 빨갛게 색칠하는 모습은 회사에서는 정말이지 보기 싫은 광경이었다.

 신나게 서류에 난도질을 당하고 나서, 그 기분으로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같이 밥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허기짐은 식사시간만이라도 팀장과의 일 외적인 친밀도를 높이기 위한 감정노동의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팀장은 겸상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되는 것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가깝고도 먼 팀장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 밥이 목에 걸릴 뻔했던 주옥같은 말이 생각났다.

 '팀장은 그러니까 관리자는 곧 회사다, 팀장의 말은 곧 회사의 생각이다, 정 따위에 휘둘려 친하게 되면 서로가 나중에 힘들어진다, 우리는 내일 헤어질지도 모르는 남이다.'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정도의 충격적인 말을 했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직책을 달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몹시 외로운 존재라고 했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어쩔 수 없이 동료를 집으로 보내야 했던 뼈아픈 경험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팀장은 철저하게 회사 편에 서기 위해 외로움을 자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영혼 없는 질문과 건조한 대답이 오고 갔고, 나는 팀장이 아니라 회사와 밥을 먹는다는 생각으로 배고픔을 채웠다.

 같이 밥을 먹었지만 철저하게 나만의 허기짐으로 좁아터진 식당 한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린 채 외로움을 채우고 있었다. 팀장의 유별난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이 날 정도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는 기억이다. 무리 지어 있지만 사람은 어차피 외로운 존재이고 혼자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었다.

 팀장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나름 서로의 친분이 두텁다고 생각했던 회사의 동료들이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모호한 관계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집으로 보내야 할 사람들은 없던 정내미도 떨어져 나갈 정도로 기분 나쁘게 회사와 이별하는, 나이 많은 선배들의 퇴직 장면을 실제로 지켜보았다.

 회사는 아주 놀랄 만큼 직원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팀장의 평가는 곧 회사의 평가라는 의식에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회사를 다니는 것이 고역이었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서서히 끓는 물에 몸이 익어가는 개구리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가는 부자연스러운 관계는 회사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는 나와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철창으로 가둬놓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현실 속에서 벗어나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해지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을까,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회사밖에 있다. 그렇기에 정년까지 다니거나 정년에 가까이 다닌 직장인들에게 내가 찬사를 보내는 이유일 것이다.

 어느 예능 프로에서 '나만 아니면 돼'라는 자막이 흘러나올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예능은 예능으로만 보아야 되는데 그런 치열했던 조직에 너무 깊이 관여하고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내겐 상당히 듣기 거북한 단어였다. 급할 땐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다가도 누군가를 버려야 되는 땐 우리는 철저하게 남이 되어 있었다.

 신입사원이 가진 순수함이 회사의 개그와 결합될 때, 순수한 웃음이 더럽혀지기 전에 뛰쳐나가는 장면도 수없이 목격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회사 생활이 예능처럼 재밌게 잠깐 비쳤던, 그런 친구들과 퇴직 면담을 할 때, "선배들의 몸 개그를 보면서 실컷 웃다가 도저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못 버티고 나갑니다".라는 뉘앙스의 신입사원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 나 역시 팀장이 되었고 달라진 건 없었다. 스스로 전임 팀장처럼 되지 말자라고 다짐만 했을 뿐, '팀장은 회사다'라는 의미를 알게 되었고, 회사는 사람의 들락날락 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변함없이 건조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너무 신경 쓰지 마라'라고 했던 팀장의 말은 지금까지도 귓가에서 맴돈다. 그 팀장이 현명했던 것이었을까..., 유별난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건넨 말이었을까..., 여전히 관계는 분명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임은 틀림없었다.

 돌이켜보면 회사는 빨간팬 첨삭지도를 해주었던 마지막 배움터였다. 노동의 대가이긴 하지만, 돈을 받고 다녔던 학교와 같았다. 일정한 목적, 업무 과정, 설비와 제도에 의해 계속적으로 직원에게 교육하고 성적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이익 추구라는 본연의 목적 때문에 인간관계의 팍팍함으로 잃은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관계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상당한 재산이 형성되기도 했으니까...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적당히 모르는 게 약일 거다, 사는 게 뭐 다 그런 거지, 나만 문밖으로 밀려난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그전의 인간관계보다 더 넓고 복잡한 관계로 살 것이고, 길을 다시 헤매더라도 길을 잃었을 때 절실하게 배우는 것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첨삭지도하고 계속 위로하며 외롭게(?) 살아야지. 추천되는 사람을 쉽게 '친구 추가'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지만, 삭제할 필요는 없다, 그것마저 차단할 이유가 없다. 숨어버리는 삶이 아니니까.

#회사원 #회사 #첨삭 #관계 #친구 #팀장

작가의 이전글 농사꾼 아버지의 저금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