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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Jun 12. 2020

미숫가루 얼음에 대한 추억


 퇴근할 카페에 있는 각 얼음을 담아오라는 말을 건네며 아내가 현관문을 나선다. 얼마 전 처갓집에서 보내 준 미숫가루를 타 먹기 위해서이다. 장모님이 이맘때쯤이면 보내주시는 미숫가루를 타먹기 위해서 얼음이 필요했다. 아무리 차가운 에 타먹는다 한들 얼음이 빠진 미숫가루는 왠지 불완전 식품처럼 고유의 시원한 맛이 나지 않는다.

 돌아서면 까먹는 습관적인 일시적 기억상실로 인해 핸드폰의 알람 기능에 의지해 본다. 퇴근시간에 맞춰 '얼음 가져가기'로 알람을 설정하고 집을 나섰다. 카페를 하기 전에는 동네 슈퍼에서 얼음을 사서 미숫가루에 넣어 먹었다. 냉장고를 두고도 얼음을 사 먹는 아이러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얼마 만의 얼음배달 심부름인가, 잠시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고향집에 냉장고를 언제 장만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지금은 용도별로 몇 대씩 가지고 있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친척 아재의 집에서 스덴 그릇에 꽁꽁 얼려진 얼음을 받아서 집으로 가져갔던 장면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동네에 냉장고, TV, 전화기를 가진 집이 몇 집 되지 않던 기막힌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아재의 집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낮에는 얼음을 얻어먹었고 저녁엔 TV를 보기 위해 큰형의 등에 매달린 채, 좁은 논두렁 길을 위태롭게 걸어가야 했다. 있고 없고의 차이는 서글펐지만, 그런 아재라도 가까이 살고 있었다는 게 다행히 행복했던 기억이다.

 스덴 그릇의 얼음은 부엌칼에 의해 몇 개의 큰 조각으로 나눠져서, 보리향이 가득했던 낡은 주전자와 오이채국 그릇 속으로 풍덩거리며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조각은 미숫가루 대접으로 향했다. 모친은 최대한 큰 조각으로 깨뜨렸다. 큰 덩어리가 녹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더운 여름의 불편한 경험으로 익히셨다.

 서서히 녹은 큰 얼음조각이 한입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작아졌을 때, 고정 심부름꾼의 특권이라도 되듯 막내인 나의 입으로 들어갔다. 사탕처럼 입안에서 녹아 사라지는 혀의 간지럼으로 얼음 심부름은 여름 내내 이어졌다. 행복이란 불편한 환경에서 작은 얼음조각을 녹여먹는 것에서도 충분했다. 지금은 얼음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반면에 행복감은 얼음조각처럼 금세 녹아버리는 세상이기도 하다.


 집에 있는 냉장고에는 얼음이 없다. 차가운 물을 언제든지 마실 수 있기 때문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다. 양문형 냉장고의 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냉동식품은 전화 한 통이면 다음날 손에 넣을 수 있는 초고속 배달 시대에 걸맞지 않게 만년설에 뒤덮인 채 줄어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얼릴만한 여유로운 공간이 없다.

 어릴 때의 불편한 때문이었을까, 무한 저장 습관은 냉장고뿐만 아니라 집안의 수납장 곳곳에서도 볼 수 있다. 선입선출의 규칙도 없이 한 번 들어가면 언제 세상 밖으로 나올지 모르는 물건들로 채워진 저장고로 가득했다. 몸에 밴 저장 습관은 음식과 옷, 그리고 여기저기 넣어둔 물건도 늙어간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궁금함으로 가득 채워진 아재의 집에서 보았던 냉장고는 그 시절과는 다른 궁금증 저장고로 이용되고 있었다. 유통기간이 넘어버린 것들은 짐작으로 유효기간을 다시 설정하여 저장고 안으로 들어간다. 시골에서 가져온 곡식과 가루들은 유통기간과 유효기간의 별다른 제약 없이 '먹어도 별 탈 없겠지'라는 의심을 받으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아내와 수없이 냉장고 비우기 프로젝트를 계획하곤 했다. '냉장고에 있는 것부터 먼저 먹고 나서 식료품 사기', 굳은 결심을 하고 마트에 들어선다. 목표한 물건을 빠르게 손에 넣고 바로 계산대로 직행해야 한다. 잠시 한눈을 파는 순간, '1+1 또는 2+1'의 파격 세일을 하는 물건들의 유혹에 보기 좋게 넘어갈 수 있다.

 화단에 피어있는 꽃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처럼, 화려하게 놓여있는 상품들을 보며, 길게 늘어서 있는 매장 진열대를 의연한 마음으로 지나치는 일은 보통의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화려한 먹거리들의 유혹에 늘 그랬듯이 보기 좋게 발목이 잡힌다. 그렇게 냉장고는 가득 채워지고 냉동고는 여유로울 날이 없다.

 얼음을 담은 가방을 메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마음이 그 시절 부모님과 형들이 있는 고향집으로 가는 듯하다. 미숫가루에 들어가는 얼음에 대한 의미는 참 많이도 달라졌음을 생각하며, 스덴 그릇에 담긴 얼음은 아니지만 한입에 들어가서 혀끝에서 살살 녹는 미숫가루의 맛을, 그 시절의 그림을 상상하며 카페를 나선다.

#미숫가루 #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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