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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남캐 Jun 04. 2022

실연을 견뎌 보았습니다

삶은 나비효과

 몇 개월간 짝사랑해오던 사람을 잃었다. 최근 퇴사를 결정한 직장 동료였다. 마지막 기회였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음을 밝혔다. 물론 그 과정이 차갑지 않아서 참 감사했다. 오히려 건강하게 웃으며 나를 감싸주기까지 했다. 오빠는 정말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오랜 친구가 있으면 소개해 주고 싶을 정도라고.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을 짝사랑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정말 행운이다.'싶었다. 개운하게 모든 감정들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근이 가까워져 오고 세상에 어둠이 내리기 전까진, 정말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트를 나서자마자 나는 참아왔던 울음을 아이처럼 터뜨렸다. 관자놀이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울었다. 눈물로 퇴근길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집에 돌아와서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기분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즐겨 듣던 인디뮤직들-카더가든, 에피톤 프로젝트, 심규선-의 멜로디는 장송곡처럼 황량했고, 1300원짜리 즉석 6입 김치만두는 3개째를 넘기자 도저히 씹어 넘길 수가 없었다. 찰흙을 씹는 듯한 끔찍한 맛이 느껴졌다. 나는 친구들과 그룹통화를 하며 근근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물론 실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 슬픔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고, 나만의 방식으로 건강하게 감정을 소화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벼운 이야깃거리, 혹은 웃음거리로 한 순간 소모되어 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싱겁게 끝나버린 외사랑이라 할 지라도 나에겐 몇 개월간 전적인 사랑이었다. 나로 하여금 어제보다 더 나은 하루를 살아가게 만들 만큼, 그녀는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친구들과의 통화가 끝난 것은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필사적으로 슬픔을 씹어 넘겼다. 그리고 모니터 내부의 백지와 의연히 마주했다. 매일 글을 쓰기로 정한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삶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써야 했다. 설령 세상의 모든 권태와 게으름이 한순간 내 안으로 밀려든다 할지라도, 반드시 써야만 했다. 오늘만큼은 쓰지 않으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 형식이었다. 어떻게 당신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사랑으로 왔고, 내가 그 사랑을 어떤 태도로 대해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나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바꿨는지. 20대의 끝자락, 홀로 고요히 사랑할 수 있었던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마치 춤을 추는 사람처럼 홀린 듯이 써 내려갔다. 그렇게 쓰면 쓸수록, 내면이 점차 감사로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눈석임처럼 통증이 사그라들었고, 그 자리엔 온갖 풀꽃들이 소박하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벽 4시쯤이 되어서야 나는 겨우 쓰는 일을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글의 마지막은 이랬다. 나의 온 마음이 집약되어 있는 문장이었다.

"어디서든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삶에 찾아와 주어서 고맙습니다."





 꼭 실연이 아니더라도 삶의 길목마다 찾아오는 슬픔의 순간들이 있다. 직장에서 차가운 비판을 들었을 때, 불현듯 실감 나버린 막막한 미래에 가슴을 칠 때, 내 편이 아무도 없는 것 같을 때, 비좁은 방이 마치 새장처럼 느껴질 때. 되돌아보면 그때마다 나를 다시 살게 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삶"이었다. 내게 삶이란 '나의 필사적인 선택'으로 만들어진 나비효과다. 자신을 굶기지 않기 위해 취직한 마트가, 그 마트에서 발로 뛰며 벌어온 몇 푼이, 그 몇 푼을 벌기 위해 쌓아 온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 관계 속에서 한 발짝씩 성숙해지는 나의 마음가짐이, 그 마음가짐으로 방에 돌아와 읽고 쓰는 일이 나를 언제나 살게 만들었다.

 시련이 드리워진 밤의 한복판에서도, 나는 반드시 나아질 내일을 신앙한다. 계산대 사이를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다 보면 조금은 활기를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카트를 밀고 달리며 동료들과 온몸, 온 마음으로 소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실연의 설움 따위는 새까맣게 잊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밤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지나온 시간만큼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의연하게 나의 공간을 정돈하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읽고 쓴다. 언제나 배신하지 않고 나를 치유해 주었던, 이 순간의 연속들이 바로 나의 삶이다.





 그녀의 퇴사를 앞두고 우리는 서로에 관해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출판사 편집자를 꿈꾸고 있으며, 한때는 문학평론가를 꿈꾸기도 했었노라고 말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약간은 감탄했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구나.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어.

 각자의 길 위에서 좋은 친구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나는 그녀를 마음으로 배웅했다. 남아있는 사랑도 같이 보냈다. 가서,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며칠간 충분히 아팠으니 이젠 되었다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내야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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