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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현 Sep 08. 2023

너무 배부르지 않게, 마음먹기 (1)

두 번째 강박: 의지




1.


        오늘치 마음을 먹습니다. 부지런히 의지를 세웁니다. 창조행위가 수반하는 여러 위험과 불확실성을 견디려면 적지 않은 각오가, 단한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하는 인간은 부지런히 마음을 먹습니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생각’(마음먹기) 합니다.  


        그는 부지런히 먹는 자입니다 마음을. 육체가 음식을 먹어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듯이, 창조하는 정신은 마음을 먹어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너무 배부르게 먹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마음도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독 심한 배앓이를 한 정신은 마음먹기를 아주 단념하기도 하지요. 의지를 모두 소모해 버려서, 혹은 남아있는 의지마저 불태우고 싶지 않아서 무언가를 하겠다고 결심하는 행위를 일절 그만두는 것입니다.


        고백하건대, 내 마음 식습관은 건강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나는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마음을 먹었고, 그래서 자주 우울감에 시달렸습니다. 중독과 우울 증상으로 특히 고생을 하였던 내 이십 대 초중반을 기억합니다. 한 번 컴퓨터를 시작하면 자의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자리에 앉으면 열 시간 정도는 해야 직성이 풀렸고, 그것도 몸이 피곤하여 어쩔 수 없이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컴퓨터를 하지 않을 때에는 한없이 우울하고 무기력했습니다. 그게 싫어서 청년은 변화하고자 여러 번 마음을 먹었습니다.


        허나 매번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마음을. 다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을 먹었으니 어김없이 패를 하였고, 결국 또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더 큰 중독에 스스로를 내맡겼습니다.


        골방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청년의 정신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번뇌에서 자유로워진 마냥, 보다 높은 도덕적 위치에서 관조(觀照)하 행동하였지만 속으로는 은밀한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짜증이 안으로만 파고든 탓입니다. 또 남의 의욕에는 냉소적으로 반응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떤 기적을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냉소에는 뿌리 깊은 질투가, 창조하는 힘을 되찾고 싶어 하는 적나라한 욕망이 깔려 있었던 고로.





2.


        언젠가 니체를 읽던 중에 흥미로운 구절과 마주쳤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의욕하지 않는 인식, 더 이상 창조하지 않는 인식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니체는 위와 같은 인식을 순수-인식이라 칭하였습니다. 순수-인식이란 인식 외에는 아무런 불순물도 없다는 점에서 “순수”한 인식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는 인식이기도 하지요.                              


  그대 순수-인식을 하는 자들을! 그대들을 나는 음탕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대들도 대지와 지상의 것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대들의 사랑에는 수치심과 비뚤어진 양심이 있다. 그대들은 달과 닮았다!

  지상의 것을 경멸하라고 사람들이 그대들의 정신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대들의 내장까지 설득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 내장이 그대들에게 가장 강력한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이제 그대들의 정신은 그대들의 내장의 뜻에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샛길과 허위의 길을 걷는다. (...)

  그러나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거세된 곁눈질이 관조라고 불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비겁한 눈길로 자신을 더듬는 것을 아름답다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아, 고귀한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이여!

  그대 결벽한 자들이여, 그대 순수-인식을 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이 결코 아이를 낳지 못하리라는 것이 그대들에 대한 저주다. (p. 261 - 264)



        같은 자리에서 여러 번 되읽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았습니다. 니체가 묘사하는 순수-인식과 내가 겪어낸 우울 증상이 여러 군데 서로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관조를 빙자한 무기력한 체념이 그러하였고, 은밀하게 불타오르는 질투심이 그러했습니다.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수동성이 그러했고,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는 무능력함이 그러했습니다. 나는 그의 저주가 너무 적나라해서 기분이 나빴다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여 한 번 더 기분이 나빠야 했습니다.





3.


        창조하는 인간은 부지런히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다만 너무 많은 의지를 한꺼번에 세우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의지를 과식하면 배탈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가 "으으지"로 변질이 되는 지점은 어디쯤인지요. 그것은 자아가 실존을 앞지를 때, 자아가 자기 몸으로부터 멀어질 때입니다. 몸으로부터 멀어진 자아란 실로 위험한 개념입니다.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사물을 곡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녀석이기 때문입니다.


        몸으로부터 멀어진 자아는 함부로 명령합니다. 그것은 듣지 아니하고 일방적으로 강요할 뿐입니다. 으으지를 내세울 뿐입니다. 우선 실존이 있고, 자아는 그다음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현상은 주와 객이 서로 뒤바뀐 셈입니다.                    


그대는 자아(Ich)라고 말하면서 이 말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보다 위대한 것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대의 몸이며 그대의 몸이라는 거대한 이성이다. 이 거대한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동한다. (...)

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형제여,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자기(Selbst)다. 그것은 그대의 몸속에 살며, 그것은 바로 그대의 몸이다. 그대의 몸에는 그대의 최고의 지혜 속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성이 들어 있다.

그대의 자기는 그대의 자아와 그 자아의 자랑스러운 도약을 비웃는다. “나에게 사상의 도약과 비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나의 목적에 도달하는 우회로다. 나는 자아를 이끄는 끈이며 자아가 가진 개념들을 귓속말로 알려 주는 자다.”라고 자기가 스스로에게 말한다. (...)

창조하는 자기가 스스로 존경과 경멸, 쾌락과 고통을 창조했다. 창조하는 몸이 자신의 의지의 손으로 삼기 위해 정신을 창조했다. (p. 58 - 60)



        뭇사람이 자아(Ich)라고 말하면서 이 말에 자부심을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보다 위대한 것은 바로 '몸'이며, 몸이라는 거대한 이성입니다. 한편 자아 반대편에는 자기(Selbs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기는 창조하는 인간의 사상과 배후를 지배하는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이며, 몸 그 자체입니다.


        생각건대 큰 자아를 지닌 자와 순수-인식하는 자는 서로 같은 부류입니다. 양쪽 모두 몸을 경멸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들의 경멸은 오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한다면 그렇습니다. 몸을 향한 그들의 경멸을 거두기 전에는 어떠한 유의미한 창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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