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간, 나는 진실의 편에 서기로 했다"
복도 끝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검은 빨강(증오, 99%)을 뿜어내는 그 사람의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지아의 얼굴에서 연한 파랑(안도)이 순식간에 검은 보라(공포, 95%)로 변했다.
"선배, 그 사람이..."
지아가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몸이 창틀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바로 그때, 달려오던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거기 서!"
심리학과 조교 박준혁이었다.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감정색이 너무 강해서 그의 얼굴 전체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강도의 감정이었다.
"박... 선생님..." 지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내 능력으로 더 많은 것을 보았다. 준혁의 얼굴에서 증오와 함께 번지는 또 다른 감정들. 탁한 녹색(죄책감, 35%)과 검은 회색(집착, 88%), 그리고 그 아래 숨어있는 희미한 파랑(후회, 25%).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너무 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읽으려 한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통증을 참아야 했다.
"선생님, 잠시만요." 내가 그들 사이에 섰다. "무슨 일인지 차분히 이야기..."
"네가 뭘 안다고!" 준혁의 고함에 복도가 울렸다. 그의 감정색이 더욱 짙어졌다.
"비켜. 이건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지아의 손목에 남은 멍자국이 떠올랐다.
그리고 준혁의 얼굴에서 번지는 복잡한 감정들. 이건 절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지아야."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괜찮아. 이제 도망칠 필요 없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지아의 얼굴에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검은 보라가 옅어지며, 대신 연한 황금빛(희망, 42%)이 번지기 시작했다.
"거짓말쟁이." 준혁이 이를 갈았다. "넌 약속했잖아, 지아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그 순간 지아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색이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가 스위치를 끈 것처럼. 그리고 곧이어 전에 없던 강렬한 주황빛(분노, 92%)이 터져 나왔다.
"말하지 않기로요?" 지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선생님이... 선생님이 그럴 자격이나 있나요?"
준혁의 얼굴이 굳었다. 검은 빨강 속에 더 짙은 회색(당혹감, 78%)이 섞이기 시작했다.
"너희가 한 짓을..." 지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내 친구를... 은주를..."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아까 봤던 주황빛의 '친구들', 준혁의 이상한 감정들, 그리고 지아의 절망...
"민우 선배." 지아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 이제 진한 회색(결심, 95%)이 번졌다. "이제 말할 수 있어요. 모든 걸 말할 거예요."
준혁이 갑자기 달려들었다. "안 돼!"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준혁의 팔을 잡아채며 몸을 날렸다. 우리는 함께 바닥을 굴렀다. 머리를 세게 부딪쳤는지 시야가 흐려졌다.
"이서연 교수님!" 지아의 외침이 들렸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연 교수님이 달려오고 있었다. 교수님의 얼굴에서는 검은 회색(단호함, 95%)이 번졌다.
"박준혁 선생." 교수님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이제 됐어요. 모든 게 끝났어요."
준혁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얼굴에서 검은 빨강이 옅어지며, 대신 짙은 파랑(절망, 88%)이 번지기 시작했다.
"난 그저..." 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저 지켜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때였다.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두통에 나는 앞을 볼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감정을 한꺼번에 읽은 탓이었다.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의식이 희미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건 지아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보는 색이 번졌다. 연한 분홍빛(감사, 100%).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보건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옆에는 이서연 교수님이 앉아 있었다. 교수님의 얼굴에는 연한 황금빛(안도감, 75%)이 감돌았다.
"깨어났군요."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리하면 안 돼요." 교수님이 내 어깨를 잡았다. "능력을 너무 과하게 사용했어요.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지아는요?"
"안전해요. 지금은 상담센터에서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교수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박준혁과 그 학생들이 저지른 일들이 모두 밝혀질 거예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교수님."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게 정말 맞는 걸까요? 이 능력으로... 제가 뭔가를 할 수 있을까요?"
교수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연한 황금빛 속에 밝은 초록(기대, 82%)이 섞여 들었다.
"당신은 이미 하고 있어요, 민우 학생." 교수님이 내 손을 잡았다.
"진실을 보고, 그것을 지키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리는 캠퍼스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들이 저 어둠 속 어딘가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길을 걸어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