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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an 22. 2021

'오늘 뭐 먹지?' 따위의 안건.

20년 10월 즈음의 기록.

프라하에는 벌써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다. 10월에 들어가며 급히 추워진 날씨는 '여행하기 딱 좋은 유럽의 날짜는 9월까지!!'라는 격언을 다시금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아!' 나로서는 굉장히 드물게 날씨 이야기를 하고 보니(날씨 이야기는 어색한 소개팅 자리의 첫인사말 같아서 별로 쓰는 맛이 없다...),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이 곳에 몇 년째 살다 보니 새삼 알게 된 것이 있는데, 프라하의 비는 꽤나 끈질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폭우가 내리는 일은 좀처럼 보기 어렵지만, 찔끔찔끔 내리는 비는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느낌이랄까.


한번 이렇게 비가 찔끔찔끔 내리기 시작하면, 적어도 3~4일 정도는 이 비와 함께 할 각오를 해야 한다. 어쩌다 잠시 비가 그친다 한들, 이미 프라하의 공기 안에는 며칠 동안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감성이 가득 차게 된다. 가끔 나는 바로 이 감성이야말로 동유럽의 진면목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사실 썩 반가워하지는 않는다. 어쩐지 계속 비가 내리는 것 같은 이 감성에는 혼자서는 버티기 힘든 종류의 외로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물론, 나는 아내와 함께이니 별다른 걱정은 없지만, 가끔 마주하게 되는 혼자 사는 한국인, 혹은 1달 살기 체험을 하고 있는 젊은이를 볼 때면 참 대단하다 싶다.


그에 비해 아내와 나의 가장 큰 고민은 기껏해야 "오늘 저녁밥 뭐 먹지?"이다. '기껏해야'라 말을 하긴 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법 진지한 것이 사실이라, 우리는 정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편이다. 아마도 이 메뉴 선정의 문제는 둘이서 사는 삶이 매일 갱신되어감에 따라, 자연스레 서로 만들 수 있는 메뉴도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누군가는 우리를 두고 '퍽이나 먹는 것을 좋아하는 커플이로군'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런대로 사실이기도 하다. 부정할 수 없지.


좀 바보 같은 말인지 모르겠지만, 결혼이 주는 장점 중에 하나는 이처럼 '오늘 뭐 먹지?'따위의 안건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필요 없는 감정 소모를 할 일이 확실히 줄어든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이것을 '결혼했으니 배우자의 감성을 더는 신경 쓰지 않는군'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함께 산다는 것은 상대의 감성 변화를 더 빨리 파악할 수 있으며, 상대의 컨디션(감정 상태를 포함한) 또한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나와 아내는 서로에게 확인하고는 한다. "지금 컨디션 괜찮아?"


사실 어제저녁은 굉장히 짜증이 솟구쳐 있었다. 현대카드의 청구액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기 때문인데, 도통 그 내역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플은 먹통이고, 맥북에서는 왜 파일이 열리지 않는 것인지. "IT강국의 대형 카드사가 이 모양이라니, 가수들이나 부르지 말고 IT에 투자 좀 하라고!"라며 잔뜩 짜증 나 있는 나를 두고, 아내는 별다른 반응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이런 상태의 나는 그냥 잠시 가만히 두면 이내 잠잠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나 일까, 아직도 나는 카드 내역 따위는 모르지만, 지금은 참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곁에도 누군가 있다면, '지금 괜찮아?'하고 물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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