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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May 26. 2023

마음을 정리하는 '스타카토' 제주여행

왕복 8만 원이 채 되지 못하는 비행기값. 때마침 아내가 장모님과 해외여행을 떠나 혼자인 상황. 그렇게 다시 한번 제주도로, 이번엔 일행 없이 홀로 떠났다. 이제 2주도 남지 않은 복직을 앞두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마음의 울림에 응답한 것이다.

이제는 바다보다 더 좋아하는 중간산, 거문 오름 근처 게스트하우스에서 첫날을 묵었다. 이미 날은 어둡고, 일요일 밤이라 손님도 아무도 없었다. 오름이 불어 내리는 것 같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동네를 거닐었다. 사진으로는 담기 어려운 별빛의 향연에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다음 날,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미리 신청한 요가수업을 들으러 갔다. '컬러요가'라는 조금은 특별한 클래스였다. 요가를 하기 전 만다라 그림을 그려보며 내면을 탐구해 보는 시간이었다. 그저 손이 가는 데로 그어진 선들을 바라보며, 선생님과 함께 무의식을 살펴보았다. 모든 일은 양면적이라, 두려움이 있으면 용기가 있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게 된다는 말이 가슴 깊이 닿았다. 

돌담을 바라보며 하는 요가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홀로 수업을 받아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난도가 높지 않았음에도, 마지막 사바 아사나를 할 때는 기절하다시피 누웠다. 이탈리아어로 '일시정지'라는 뜻인 '빠우사'를 몸소 느낀 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몸이 느끼고 있어 다시 재생버튼을 눌렀다. 함덕 쪽으로 내려와서 점심을 먹고, 올레길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는 렌터카를 빌리기에 잘 느끼기 힘들었던 올레길의 모습이 좋았다. 비록 날이 흐리고 비가 왔지만 이 또한 제주의 모습이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날을 함께 한 숙소는 '책'을 테마로 하는 숙소였다. 이름부터 '서점 숙소'인 이곳에서는 매일 8시에 '오름에게'라는 독특한 행사가 열렸다. 각자 필사를 한 후, 그 내용을 공유하는 시간이다. 일종의 독서토론인 셈이다. 사실 이 시간을 가고 싶어 제주 여행을 급하게 설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살에 벌써 책을 두 권이나 쓴 학교 후배 작가님의 사회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각자가 뽑아낸 구절에는 저마다의 생각과 고민, 의문이 녹아있었다. 진로와 꿈에 대해 저울을 두고 고민하는 사람, 진정한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우울에서 벗어나고자 한 노력을 공유한 사람... 나는 알랭드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일부를 공유하며, 달걀 바구니를 전부 한 사람에게 주는 사랑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생각했던 만큼,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나와 나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책이라는 매개체 앞에서 그것은 대화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나이는 그저 누군가가 가지 않은 길 중 하나를 가 본 이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6개월 이상 연애를 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10년간 한 사람과 만나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다. 



사실상 제대로 즐긴 날은 단 하루지만 오전 오후 밤이 각각 하루에 비견될 정도로 알찼다. 원래의 목적인 마음 정리에는 물론, 다른 이들의 삶을 바라보고 나누어보는 시간도 뜻깊었다. 내가 가진 것, 그 대신 포기했던 것, 그리고 아직 간직할 수 있는 것까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젠가 또다시 혼자서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건 같은 프로그램을 한 번 더 진행해보고 싶다. 쉼과 책이 필요한 순간은 분명 다시 돌아올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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