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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검 Jul 19. 2024

더는 돌아서서 곱씹지 않기를

율리시스 에피소드 3


1904년 6월 16일 오전 11시

샌디마운트 스트랜드 비치, 더블린


글이라는 게 유동적이다. 같은 생각이라도 이렇게도 쓸 수 있고 저렇게도 쓸 수 있다. 공기나 물처럼 손에 잡히는 게 아니다. 생각은 시시각각 바뀌고 잡아 놓지 않은 생각은 사라지기 십상이다. 나 자신 예전과 다르지만 같기도 하다. 이 순간의 나는 언제 나를 떠나 타인이 될지 모른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흘러간다. 불안정하고 일시적이다. 사라지고 재생한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의미는 무엇이고 도대체 나란 누구인가. 나라는 사람과 외부 세상, 이미 완성된 나와 완성되어가고 있는 나. 보이지 않는 시험과 긴장 속에 오늘도 하루를 살아낸다.


달키에서 트램을 타고 샌디마운트에 도착한 스티븐은 스트랜드 비치의 모래사장 위를 걷고 있다. 프로테우스로도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스티븐의 내면의 목소리, 독백으로 채워진다. 오디세이에서 프로테우스는 변장을 위해 시시때때로 몸을 변형하는 바다의 신으로 나온다. 프로테우스는 이 에피소드에서 형태가 없고 예측할 수 없으며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을 대변한다. 스티븐의 의식은 이곳저곳 경계선 없이 흐른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렇다. 밀려드는 파도, 변하는 날씨, 지나가는 바람, 썩고 녹스는 것들, 사람들, 동물들, 세상을 표현하는 자신의 매개체인 언어조차 부단히 변하고 있다. 신발 아래 진흙은 꿈틀대고 의식은 바다 위에 떠돈다.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이런 거였다.


근처 사라 외숙모네에 들를까 말까. 그가 만드는 상상은.. 사팔뜨기 사촌 월터가 문을 열어주고 외삼촌 리치가 그를 반긴다. 법률회사에서 비용 회계사로 일하는 리치는 침대에서 서류일을 보고 있다. 조카를 대접하기 위해 위스키와 청어 튀김 베이컨을 들먹이지만 집에 있는 건 요통약뿐이다.

All'erta!

All'erta!

리치는 페르란도의 아리아를 흥얼거린다.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중 최고 넘버라며 휘파람에 다시 톤을 실어 본다. 조카 스티븐처럼 음악과 오페라를 사랑하는 리치는 상상 속에 서서히 사라진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그들의 집을 지나쳤다.


Image from JoyceImages


파리 유학시절 그가 케빈 이건을 찾은 건 의외였다. 나라 먼저 되찾자던 친구들의 설득에 독립운동 같은 건 개나 줘라 했던 스티븐이 외국에 가서는 망명한 애국투사와 마주 앉았다. Home Rule(아일랜드 독립) 리더였던 찰스 파넬이 불륜 스캔들로 파문을 일으킬 때 그를 먼저 배신한 건 가톨릭 교회였다. 파넬의 몰락과 함께 Home Rule의 희망은 꺼져갔고 교회는 처음으로 어린 스티븐에게 실망으로 다가왔다. 조상이 타민족에 나라를 내주고 타국어를 모국어로 삼은 걸 분개한 만큼 아일랜드 독립은 그에게 무엇보다 큰 화두이고 염원이었을 것이다. 아니 모든 걸 떠나 자신의 무능하고 소통불능 아버지를 대신해 줄 대상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케빈은 가난한 유학생 스티븐에게 밥을 사주고 많은 얘기를 들려준다. 아일랜드에 대해서, 희망과 음모,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리더 제임스 스티븐스의 배신, 런던 클러큰웰 감옥 구출 작전 실패에 대해서… 과거에 파묻혀 사는 빈 껍데기 투사를 잊지 않고 찾아준 사람은 스티븐뿐이었다. 정오의 잠. 스티븐은 바닷가 거친 바위 위에 길게 드러누우며 두 눈 위로 모자를 내린다. 케빈 이건이 졸며 하던 동작이 이제는 그의 것이 되었다.


율리시스의 언어는 프로테우스를 닮아있다. 능숙하고 다양하고 수시로 변한다. 조이스의 언어적 시도는 글자 놀음에 다름 아니다. 셰익스피어 고전 영어 buss(kiss), shoon(shoes), nuncle(uncle), spake(spoke)들이 죽은 조개껍질처럼 밟히는가 하면 죽은 영어 nans(serving maids), creepystools(three legged stool)가 끼어있고 어릴 적부터 배워 익숙한 라틴어 Euge! Euge! Terribilia meditans, 파리의 언어 Comment? A oui! 대학 전공 이태리어 Gia. . . Gia, O si, certo! 독학한 독일어까지 Nacheinander, Schluss, 늙은 아일랜드어 slainte!(건배), 집시 언어 mort(woman), wap(love), lingo(language)… 기억의 파편 조각들, 현재와 과거의 오버랩, 상상과 회상의 무경계, 일이삼인칭 시점, 독백 뭉치에 끼인 얇은 서술등이 의식의 흐름 안에 온전히 자리잡고 있다.


주위 어디를 봐도 죽음이 보인다. 발아래 밟히는 조개껍질, 해초 위에서 썩어가는 죽은 개, 익사한 남자의 떠오를 시체, 난파한 스페인 함선 아마다의 잔해, 바로 이 바다에 갇혔던 고래들,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꿈속의 어머니. 와인빛 어두운 바다. 바다를 물들이는 창백한 뱀파이어. 죽음과 모성. 그의 애도는 짧은 시가 된다. 스티븐 자신의 프로테우스 효과. 의식의 미로 속에서 그가 찾은 통로는 언어의 파편들, 시적 영감이었다. 종이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며 입으로 뇌로 그것들이 빠져나가지 않게 시구를 고른다. 종이. 지폐는 꺼지고. 교장 디시가 준 편지를 꺼내 쓰이지 않은 밑자락을 찢어내어 그 위에 끄적인다.


예술에의 열망. 부드러운 어루만짐의 갈망. 있는 그대로 세상을 자유롭게 받아들인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면. 예술가로서의 나를. 바다가 보인다. 달바라기 바다가. 언제나 그곳에 있어 줄 어머니와 같은 바다가. 샌디마운트 스트랜드의 조수가. 산다. 고통은 멀다. And no more turn aside and brood. 더는 돌아서서 곱씹지 않기로. (예이츠의 이 시구는 내게 얼마나 머물지..) 소리 없이 움직이는 배가 귀가하고 있다. 물을 거슬러 더블린 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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