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항(香港)
침향이 거래되던 항구. 홍콩이라는 지역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1], 어쨌든 홍콩은 이름부터가 "항구"다. 좁은 영토지만 홍콩섬과 구룡반도, 그리고 여러 섬까지 바다에 면해 있다. 특히 홍콩 센트럴 중심가에 붙어 있는 빅토리아 하버는 홍콩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며, "심포니 오브 라이츠"를 볼 수 있는 야경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평생 안 질릴 것 같은 빅토리아 하버 뷰 (이미지: Unsplash.com) 이런 홍콩에 살다 보니 아무래도 배를 탈 일도 많다. 한국이나 미국에 살 때는 배를 타는 일이 특별한 이벤트였는데, 여기서는 중요한 교통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는 워낙 탈것 매니아라 홍콩에 이사 온 뒤에는 이층 버스, 미니버스, 트램 등에 푹 빠졌는데, 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를 따라(?) 여러 종류의 배를 타는 경험을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한 버스에 비유해서 한 번 설명해 보자면..
통근 페리: 시내버스
이곳에는 출퇴근으로 페리 서비스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시내버스와 마찬가지로 여러 노선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홍콩섬과 기타 지역(구룡반도의 홍함, 쿤통이나 란타우 섬의 디스커버리 베이)을 오가는 페리가 있다. 대개 통근용이다 보니 평일 아침엔 지하철 줄을 서듯 페리 나들목에 직장인들이 쭉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급한 일이 없으면 물론 이런 배도 관광 목적으로 타기도 한다. (우리처럼) 시내버스를 타고 이런저런 구경을 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이.
워낙 관광 상품이기에 통근용이라고만 보긴 어렵지만, 단거리로 제일 유명한 페리는 스타 페리일 것이다. 침사추이와 센트럴(완차이 가는 배도 있다)을 오가는 독특하게 생긴 이 페리는 역사가 아주 깊다. 옛날에 지하철(MTR)이나 해저 터널이 없을 때부터 이용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층짜리 이 페리의 최장점은 가격이다. 대중교통이 그다지 비싸지 않은 홍콩이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싼 축에 속할 것이다. 지하철 기본요금이 천원이 좀 넘고, 택시 기본요금은 3,500원 정도 되는데, 그 와중에 스타페리 평일 요금은 고작 350원 남짓이다. 배를 타고 빅토리아 하버를 지나는데 몇 백 원이라니, 정말 탈 만하지 않은가.
이게 바로 스타페리. 다 알쥬? (이미지: Unsplash.com)
섬에 가는 페리: 시외버스
관광을 할 때는 주로 홍콩 섬과 구룡반도에 머물지만, 사실 홍콩의 영토에는 큰 섬이 몇 개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공항과 디즈니랜드가 있는 섬이 란타우다. 뿐만 아니라 라마 섬, 청차우, 펭차우 섬 등도 센트럴에서 배를 타면 1시간 이내로 닿을 수 있다.
버스로 따지면 광역 버스나 시외버스랄까? 센트럴 페리 선착장에는 이렇게 교외 섬으로 나가는 페리들이 주르륵 서 있어서, 주말 나들이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물론 섬에 살며 시내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보통 일반과 쾌속 두 가지 종류의 페리가 있고, 좌석도 일반과 디럭스가 나뉘어 있기도 하다. 디럭스는 좌석이 좀 더 좋거나 냉방이 빵빵한 등 일반석보다 쾌적하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 야외 활동에 지쳤을 때 이용하면 좋다.
요렇게 선착장이 많다. 제일 멀리는 마카오 가는 페리 피어. (이미지: 위키피디아) 센트럴에서만 이런 페리를 탈 수 있는 건 아니다. 섬 남쪽 애버딘에서도 라마 섬을 갈 수 있고, 저 멀리 북쪽 사이쿵에서도 조그만 섬들 투어를 다닐 수 있으며, 섬 동쪽에서는 동룡도에 주말 섬 나들이를 갈 수 있다. (약간 월미도 가는 느낌)
관광 페리: 시티투어 버스, 패키지 관광버스
실용적인 용도로만 페리를 이용하는 건 아니다. 관광객이라면 바다 위를 노닐며 빅토리아 하버의 야경을 구경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을 것이다. 홍콩에는 이런 관광 상품이 많은데, 사실 코로나 창궐 이후 관광객 입경을 전면 금지하는 바람에 이용이 급격히 (99% 정도..?) 줄기는 했다.
우리 가족은 홍콩에 살지만 외국인의 입장이니 몇 번 관광 목적으로 이런 배를 탄 적이 있다. 대표적인 배는 "아쿠아루나(Aqualuna)"로, 옛 홍콩의 나무배를 본뜬 아주 고풍스러운 모습이다. 노선도 여러 개가 있어서, 센트럴에서 출발하는 것이 많기는 하지만 각기 다른 경로로 뱃놀이를 즐길 수 있다. 승선하면 바닷바람이 솔솔 부는 푹신한 소파 위에 앉아서 (사실 누울 수 있다) 경치를 구경한다. 바람직하게도 어른들에게는 와인이나 칵테일을 한 잔씩 제공하며, 가격은 더 비싸지만 딤섬 등 홍콩식 식사를 제공하는 상품도 있다.
아쿠아루나 (이미지: Trip Advisor) 같은 회사에서 나오는 상품 중에 매년 히트치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해적선 모험이다. 배를 해골 깃발로 해적선처럼 꾸미고 어린이 손님들을 맞이한다. 배 안에서 해적 선장 모자나 망토, 칼 등으로 한껏 치장할 수 있으며, 보물 찾기도 할 수 있다. 황금 동전을 찾으면 젤리나 초콜릿 등 간식과 바꿔 주기 때문에, 배 안을 휘젓고 다니는 꼬마 손님들로 아수라장이다.
아쿠아루나의 해적선 상품 (이미지: Aqualuna) 앞서 얘기한 스타 페리도 정기 노선 말고 관광 상품이 따로 있다. 홍콩에서는 이층 버스를 빌려 생일파티를 하기도 하고, 트램을 빌려 칵테일파티를 하기도 하는데 이것과 유사하다. 보통 스타페리와 달리 반짝이는 전구와 색색깔 깃발로 꾸미고 간식이나 음료를 제공하며, 야경을 즐길 수 있도록 천천히 물살을 가른다.
우리 가족도 이런 스타 페리를 타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격렬한 시위 때문에 관광객의 발길이 이미 뚝 끊긴 다음이었다. 원래는 꽉 찼어야 할 배가 우리 가족을 제외하면 두세 명만 더 타서, 직원들보다도 그 수가 적었다. 야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셨지만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로부터 2년이 되어가는 지금, 코로나로 인해 사정은 더 안 좋아졌을 거라 생각한다.
스타페리 투어 (이미지: 홍콩관광청) 그 외에도 뷔페식 만찬이나 쇼를 즐길 수 있는 페리 서비스도 있다.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만큼 관광 상품으로도 마음껏 바닷길을 이용하는 홍콩 사람들이다.
정크 보트: 대절 버스(?)
마지막으로 소개할 뱃놀이 방식은 프라이빗 보트를 빌려 노는 것이다. 시간이 정해진 상품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이용하는 패키지식 관광 상품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원하는 날짜에 함께 모여 나들이를 가는 것이다. 호화 요트를 빌릴 수도 있으나 (물론 홍콩에는 부자가 많아서 빌리는 게 아니라 아예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나는 그런 경험은 없기에, 내가 해본 정크 보트 트립 경험을 소개한다.
사실 배를 빌려 주말을 즐기는 사람들을 멀찍이서 구경한 적은 전부터 여러 번 있다. 특히 홍콩섬 남쪽의 딥웥터베이(Deep Water Bay)나 구룡반도의 클리어워터베이(Clearwater Bay) 등 오목한 지형에 고급스러운 하얀 배들이 정박해 있고, 그 위에서 사람들은 선상 파티를 즐긴다. 처음에는 그냥 ‘와, 저런 부자들도 있구나’ 싶었다. 어차피 여름에는 우리도 매년 홍콩을 떠나 다른 나라나 한국으로 휴가를 가기 때문에 우리와는 관련 없다는 생각이었다.
보트를 빌려 노는 사람들 (이미지: Yacht Holimood)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코로나로 인해 국경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작년과 다를 바 없지만, 3차 유행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지역 감염이 거의 없고 백신 보급도 어느 정도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정부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어떻게든 이 좁은 땅 안에서 여태 해보지 않은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때, 아이가 다니는 국제학교 같은 반 엄마들 중 한 명이 보트 트립을 제안했다. 학부모 중 한 명은 본인이 보트를 소유하고 있다며(!) 그걸 써도 된다고 했지만, 인원이 많아 보트를 대여하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알고 보니 홍콩에는 고급 보트를 시간 단위로 대여해주는 회사들이 많이 있고, 배의 규모나 호화스러움(?)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작년에는 코로나 유행으로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었는데,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보트 대여 산업이 성황 중이라고 했다.
한 보트 대여 사이트. 출발지별, 인원별, 날짜별로 대여 여부를 조회할 수 있다. (Yacht Holimood 사이트 스크린샷 캡처)
그래서 어느 일요일 오전, 반 친구들 몇몇과 부모들은 센트럴 페리 정박장에 모였다. 처음이었던 나는 뭘 챙길지도 잘 몰라서 일단 수영복과 수건, 먹고 마실 것 등을 대충 주워 담아서 갔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영복이나 래시가드 차림에 아이스박스, 튜브, 구명조끼 등을 야무지게 챙긴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보트 트립이 처음인 사람들은 우리 가족밖에 없었다. 남편은 내게 속삭였다. “우리만 빼고 주말에 다들 이렇게 지내고 있었나 봐.” 그렇게 우리의 첫 보트 트립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빌린 보트는 20인승으로, 아주 럭셔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후진(?) 것도 아닌, 딱 보통 수준의 배라고 했다. 안에 들어가면 실내 공간과 지붕이 달린 야외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고, 야외에는 널따란 ㄱ자형 벤치와 테이블이 놓여 있다. 실내에는 테이블과 앉을 곳 말고도 선장님이 앉는 운전석과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이 갖추어져 있고, 반 층쯤 내려가면 퀸사이즈 침대가 있는 침실과 화장실 등도 있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배 2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는데, 이곳에도 앉을 수 있는 벤치와 테이블이 있어서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다. 배 앞쪽에도 앉아서 경치를 볼 수 있게 데크가 마련되어 있고, 뒤쪽에는 배를 정박하고 바로 수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간단히 샤워를 할 수 있도록 샤워기도 있고, 수영할 때 쓸 튜브나 물에 뜨는 매트 등이 마련되어 있어서 승객들은 그곳에서 사다리를 타고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이런 식.. 우리가 탄 배도 비슷하게 생김 (이미지: Trip Advisor) 센트럴에서 출발한 우리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클리어워터베이 쪽으로 갔다. 클리어워터베이는 커다란 만으로, 해수욕장으로도 인기가 좋다. 가는 길에는 시내를 금방 벗어나 골프장이 나오고, 녹음이 우거진 산과 파도로 만들어진 바위 절벽이 나와서 절경이다. 클리어워터 베이에 도착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해변에 가까운 곳은 물론이고 약간 떨어진 곳에까지 정박한 배가 수십 척, 아니 백 척은 될 것 같았다. 우리와 비슷한 배도 많았지만 훨씬 크고 멋진 배도 있었고, 요트도 많이 있었다.
클리어워터 베이 전경. 이렇게 배를 띄우고 논다. (이미지: Hong Kong LIving (좌), 위키피디아 (우))
다른 배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정박한 우리는 수영을 시작했다. 수심이 깊어 모두 구명조끼를 착용했고, 행여나 배에서 멀어지면 안 되니 튜브와 물놀이 매트는 모두 끈으로 보트와 연결했다. 우리 아이는 깊은 바다에서 해수욕이 처음인 데다 겁도 많은 편이라 무척 긴장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겁도 없이 첨벙첨벙 물에 뛰어들었다. 다른 배들도 살펴보니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놀고 있었지만, 배 지붕에 설치한 물 미끄럼틀이나 물 위에 바운시 캐슬(bouncy castle, 방방이..?)을 띄워 노는 사람들도 많았다. 바나나 보트나 수상스키처럼 수상 스포츠를 즐기려면 따로 대여 회사에 거금을 내고(!) 빌려야 하는데, 우리는 인원이 많아 생략했다.
우리 아이 말고도 물속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물에서 해파리에 쏘인 적이 있다고 한다.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어른들도 해파리에 쏘인 적이 있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놀랐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쭉 자랐지만 국제 학교 학부모들은 어릴 때부터 외국 생활을 아주 오래 한 경우가 많은데, 다들 그런 신기한 경험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날 만난 사람들만 해도 혈통은 중국인인데 국적은 미국이고, 자란 곳은 홍콩과 싱가포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살기도 했으며, 공부는 유럽에서 했다는 등 온 지구를 돌아다닌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해파리는 잘 보면 눈에 띌 뿐만 아니라 보통 한 마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떼로 있기 때문에, 조금만 조심하면 괜찮다고 한다.
한참 해수욕을 하고 싸온 음식도 나눠먹다 보니 어느덧 오후였다. 부모들은 샴페인을 마시고 아이들은 배에서 술래잡기를 했다. 보트 대여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였는데, 3시가 넘어가자 천천히 다시 센트럴 쪽으로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여름 홍콩의 습하고 무더운 공기도 배에서 맞으니 쾌적하기만 했다. 오래간만에 에어컨 바람이 아닌 자연풍을 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크 보트 트립의 장점은 아무래도 프라이빗하다는 것이다. 같은 반 친구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들은 부모대로 편했다. 또, 배 위에 있다 보니 아이들의 안전사고에 각별히 유의해야 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길을 잃을 일도 없고 낯선 사람을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편했다. 어른들이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감시(?) 하니 무사 무탈하게 뭍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단연 가격이다. 여러 가족이 보트 대여비를 나눠서 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나절 즐기는 데 수십만 원의 돈이 든다. 우리 말고는 주말마다 여름에 이런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홍콩이라는 곳 자체가 현지 서민들과 외국인 부자들의 삶이 이원화되어 있고, 접점도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기는 하지만 직접 눈으로 목격한 느낌이었다.
뱃놀이만 해도 이렇게 여러 종류라니, 이 좁은 땅덩이에서도 홍콩은 참 파도 파도 매력이 나오는 곳이다. 빌딩 숲 빽빽한 도심의 골목도, 멧돼지가 나오는 한적한 숲길도 다 나름의 매력이 있다. 무덥고 긴 홍콩의 여름. 한국은 이제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난다지만 여긴 여름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무슨 종류든 좋으니 뱃놀이를 즐겨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