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좀 익숙해져서 전처럼 울화통이 터지진 않지만, 난 도무지 홍콩의 국제학교 스케줄이 이해가 안 간다. 바로 얼마 전 크리스마스 때 2주를 쉬었으면, 양심상 춘절은 좀 덜 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백번 양보해서 춘절도 이렇게 열흘을 쉬어야겠으면, 부활절 방학이라고 4월에 또 2주 쉬는 것은 정말 좀 아니지 않은가? 그래, 부활절도 꼭 꼭 지켜야 한다 치자. 그러면 가을 중추절 때는 왜 또 일주일 쉬는 건데? (투덜투덜)
아무튼 그래서 여기는 지금 춘절, 설날 방학이다.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 온 동네방네 금색과 빨간색 장식이 휘황찬란하고, 붉은 봉투에 돈을 넣은 "라이씨"를 주고받으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물론 한국도 구정이니 남의 나라 명절이라고만 생각하진 않는다. 아파트 도어맨부터 과외 선생님, 아는 어린이들까지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두 라이씨를 건네야 하며, 안에 넣는 지폐의 수는 꼭 홀수로 마련해야 하고, 설날 당일부터 15일가량의 기간 동안 드린다는 신기한 풍습도 군말 없이 지키는 중이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안 그래도 학습 공백이 엄청난 마당에 아이 학교가 열흘이나 쉬는 것에는 입이 삐죽 나온다. 난 속이 좁으니까. 아무튼 그래도 어차피 쉬는 거, 마음을 바꿔 먹고 홍콩을 신나게 탐방 중이다. 사실 한국으로 치면 거리두기 3단계를 지난 11월부터 시행해온 홍콩인지라 갈 곳이 하나도 없긴 하다. 게다가 나들이를 하려면 시간상 식사를 안 할 수 없는데, 식당마다 테이블당 최대 인원 2인, 저녁 6시 이후 외식 금지라 3인 가족인 우리는 멀리 가기가 참 쉽지 않다. 집에서 점심을 일찍 챙겨 먹고 저녁 전에 들어오는 스케줄로 산과 자연을 누비고 있다.
홍콩 숲에서 동물을 만나다
전에 홍콩에서 아이와 함께 하이킹을 하는 것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요즘은 산밖에 갈 곳이 없기도 하지만, 아이도 많이 커서 잘 따라오다 보니 하이킹을 하는 재미가 생겼다. 게다가 곧 엄청나게 습하고 더워질 테니, 시한부의 느낌으로 마지막 시원한 시절을 즐겨야 한다.
홍콩에서는 (바선생님뿐 아니라) 다양한 동물들을 만나는데, 특히 산길에서 만나는 멧돼지가 단골손님이다. 한국에서는 멧돼지를 마주쳐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이 곳 멧돼지는 덩치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무섭지는 않다. 멀찍이서 보고는 개인 줄 알고 무심히 지나치는데 코 부분이 너무나 돼지스러워서(?) 다시 보고서야 멧돼지인 줄 안 적도 있다. 게다가 멧돼지는 사람들에게 딱히 관심이 없다. 딱 한번, 멧돼지가 사람을 쳐다보는 걸 본 적이 있기는 하다. 어떤 아저씨가 "산짐승들에게 절대로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는 팻말 옆에서 패기 있게(?) 사과 한 봉지를 던져 줬을 때였다.
산에서 자주 마주치는 멧돼지들
한편, 란타우 섬에 가면 소를 많이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보는 누렁소 같은 느낌이 아니라, 아프리카 평원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뿔이 달린 검은 소다. 도로에 누워 있기도 하고 슬슬 걸어 다니기도 하는데, 오죽하면 소 주의 표지판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들 역시 멧돼지 못지않게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졸린 눈으로 멍하니 앞을 응시할 뿐.
버스와 길에서 보이는 소들 (오른쪽 이미지: Lantau New)
그래서 이번 깜산 하이킹은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깜산은 홍콩 영토 중 신계(New Territories)에 위치한 산으로, 쇠 금 자에 산 산 자를 쓴 "금산"이다. 여기이글 네스트 네이처 트레일이라는 곳이 있어 가 본 건데, 독수리 둥지는커녕원숭이만 잔뜩 보고 왔다. 등산로 입구부터 진을 친 원숭이는 사람들을 툭툭 쳐서 과일과 땅콩을 얻어먹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기도 한다.
야생 원숭이를 처음 본 남편이 신기해서 휴대폰을 들이밀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덩치 큰 원숭이 한 마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캬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가 놀라서 말한다.
사진 찍으면 안 되나 봐.
산길을 가다 보면 사람보다 원숭이가 더 많다. 중간에 무덤인 듯한 돌 조형물이 있었는데, 원숭이 사원이라도 되는지 엄숙한 표정으로 몇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중 유달리 눈이 어질고 순한 녀석이 있어 내가 "어머, 쟤는 할아버지 원숭인가 봐." 하니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더니 또 "캬악-!" 한다. 너, 한국말 알아듣지?
불만에 가득 찬 원숭이들
알고 보니 이 산은 원숭이가 너무 많아 골치라고 한다. 야생 원숭이가 약 2천 마리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쓰레기통을 엎고 사람에게도 피해를 줘서 번식을 억제하려 정부 차원에서 노력 중이라고 한다. 나무를 타다 등산객 어깨 위에 응가를 하기도 한다니.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시늉을 하며 시비를 거는 원숭이들을 직접 보고 오니 갑자기 확 이해가 간다. 너무 많이는 번식하지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렴.
라마 섬에 가서 동굴을 보다
홍콩이 좁다, 좁다 하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다. 와호장룡에 나올 것 같은 원숭이 숲이 있는가 하면,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바닷가 트레킹 코스도 있다. 홍콩 섬 남쪽에 라마 섬이라는 섬이 있는데, 홍콩 곳곳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가 있는 곳이다. 페리를 타고 가면 바다를 바라보며 완만한 산길을 오르는 트레킹을 할 수 있어 인기가 좋다. 주윤발이 이 곳 출신이라, 주윤발 사진이 붙어 있는 해산물 식당도 갈 수 있다. (여기는 정부 기관과는 동떨어진 섬이라서 그런지 테이블당 2인 제한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홍콩섬은 바닷가도 폐쇄된 지 오래인데 라마섬은 바리케이드 쳐놓은 것이 무색하게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주윤발 형님. 이 식당에서 식사하면 홍콩 섬으로 돌아가는 페리가 공짜다.
경치가 무척 좋지만 꼭 겨울이나 흐린 날 올 것. 길이 내내 땡볕이다. 그래도 해안 절벽이며 유유히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는 단연 포토제닉 하다.
트레킹 코스에서 바라보는 바다
트레킹 코스가 끝나갈 무렵, 웬 동굴이 나왔다.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 안이 시커멓고 축축해서, 조금 들어가다 말고 다시 뒤돌아 나왔다. (안에 박쥐도 산다고는 하는데 알다시피 코로나 이후 박쥐는 질색이라) 알고 보니 예전에 일본군이 카미카제 미션을 수행할 때 보트를 숨겨놓던 동굴이라고 한다. 갑자기 무시무시한 기분이 든다. 카미카제라 하면 일본의 군국주의가 생각나 뱃속부터 씁쓸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막상 이렇게 내 눈으로 그 현장이었던 곳을 보면 기분이 더 이상하다.
이미지: I love HK
홍콩에서 자란 한국 교포 재니스 리 작가의 <피아노 교사>라는 책을 보면 일본군의 만행을 겪어낸 것이 다만 우리 민족만은 아니란 것에 가슴이 시리다. 비슷한 야욕에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그중 누군가는 애국자였을 것이고, 일부는 숨죽이고 있었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기회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이 살던 장소였단 것을 이 동굴 하나가 말해주는 것만 같다.
아무튼 이렇게 연휴가 지나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홍콩에서 설을 맞은 건 네 번째지만, 한국에 가거나 여행을 떠나서 (아니면 코로나 창궐로 공포에 질려서) 홍콩의 춘절을 제대로 겪어 보는 건 처음이다. 홍콩 사람들은 설 전에 빳빳한 새 돈을 넣은 붉은 라이씨 봉투를 수십 개, 많으면 백 개까지 준비한다고 한다. 돈 봉투가 나간 만큼 자신에게 복이 들어온다고 믿는다고. 코로나 장기화로 더 퍽퍽해진 이기적인 내 마음이지만, 넉넉한 자연을 보고 오니 새해를 맞이하며 베푸는 마음이 조금 더 이해가 간다. 올해는 소의 해니, 란타우의 소들처럼 (멍 때리는) 여유롭고 자유로운 한 해가 되길. 新年快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