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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Sep 01. 2020

아이와 함께 걷는 홍콩의 숲길

Tai Tam Country Park

"홍콩"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세요? 


아마도 빼곡한 마천루와 화려한 야경, 낡은 건물 속을 누비는 이층 버스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의외로 홍콩은 ‘빌딩 숲’이 아닌 ‘진짜 숲’을 즐기기 좋은 곳이랍니다.


홍콩 섬에서 사람들이 주로 일하고 거주하는 곳은 구룡반도를 마주한 북쪽 바닷가인데요, 고도로 개발된 이러한 지역을 제외하면 사실 상당히 높은 산과 한적한 바닷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홍콩의 날씨는 3월 경부터 습하고 더워져서 한 10월, 11경까지는 숨 막히게 덥고(마스크 쓰고 있으면 이러다 똑 죽겠다 싶은..), 연말부터 몇 달간은 한국의 가을 날씨처럼 무척 쾌적하고 선선한 날씨가 지속돼요. 바로 요 시기를 틈타 야외활동을 많이들 하는데, 주말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내를 벗어나 이런 산속을 찾곤 합니다.

홍콩 섬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 탁 트인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답니다.

홍콩은 인구밀도가 워낙 높아서 어딜 가나 복작복작 붐비는데요, 그건 한창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이 지내는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심을 조금 벗어난 주거 지역에는 바닷가 산책로와 놀이터가 비교적 잘 조성되어 있지만, 땅값이 비싸고 건물이 빽빽한 도심에는 학교 운동장조차 동네 농구장보다도 작은 열악한 곳이 많거든요. 운동장만큼은 그래도 큼직한 한국에서 자란 저는 그런 학교에서는 체력장이나 달리기 경기를 할 수 있을까, 속으로 궁금해지곤 합니다.


또 홍콩에는 한국 식의 키즈카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대신 고층 대단지 아파트에는 대개 어린이 놀이방이 갖춰진 클럽하우스도 많이 찾아볼 수 있어요. 어린이들이 즐겁게 뛰어놀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실내다 보니 죙일 에어컨 바람이 나오고 답답한 부분이 있지요.

인공적으로 조성된 대형 아파트 클럽하우스 놀이방(좌)과 복잡한 홍콩의 거리(우, 출처: flikr)

저희 가족은 처음에 홍콩으로 이사를 와서 생각보다 험준한 산세에 놀라긴 했지만, 하이킹을 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어요. 아이가 겨우 만 네 살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아이가 어려서 아쉽지만 못 가겠다'라고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일본 친구 가족이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유모차를 끌고 나가는 걸 마주쳤는데 글쎄 그 쪼꼬미들을 데리고 하이킹을 간다는 겁니다!


알고 보니 홍콩에는 산도 많고 멋진 하이킹 코스도 많아서, 정부 차원에서도 트레일 코스를 많이 개발하고 홍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소요 시간별, 지역별, 또는 난이도별로 코스를 선택하고 상세한 지도를 볼 수 있는 앱도 여러 가지 개발되어 있고요. 저도 그 친구에게 소개받아 앱을 하나 다운 받아서 둘러보는데, 카테고리 중 ‘Family Walk’라는 것이 눈에 띄었어요. 일반적인 등산로와 달리 포장이 되어 있어 유모차나 스쿠터, 밸런스 바이크 등을 가지고 갈 수 있고,  우리가 아는 ‘둘레길’처럼 경사가 가파르지 않도록 조성된 코스죠. 무엇보다 평이한 난이도임에도 숲을 완전히 느낄 수 있어, 아이들과 자연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일 듯합니다.

홍콩 하이킹 앱 중 하나인 Enjoy Hiking 캡쳐 화면. 지역별, 난이도별, 소요 시간별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여러 코스를 검색해보고 선택할 수 있어요.

도심에서 10, Tai Tam Country Park 

오늘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트레일을 소개해 보려고 하는데요, Tai Tam Country Park 안에 있는 Family Walk 트레일 코스입니다. 타이탐은 홍콩 섬 동남쪽 지역 이름인데, 이 곳에 위치한 저수지 주위를 감싼 아름다운 숲을 걷는 한적한 길입니다. 가족 단위로 바베큐를 할 수 있는 장소도 널찍하게 조성되어 있고, 갈림길에서 다른 트레일 코스로 이어 걷다 보면 생물다양성 센터도 방문할 수 있어요. 시작점에 따라 다양하게 즐길 수 있지만, 댐 옆에 있는 입구에서 시작하면 특히 어린아이들이나 반려견을 데리고 오는 방문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요.

 

Tai Tam Country Park의 다양한 모습



아이들이 보는 '자연'스러운 공간, 하이킹 코스 

학교나 박물관, 도서관에 비해 하이킹 코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공간 입니다. 자연이라는 공간 자체가 갖는 특수성이죠. 70층짜리 아파트에서 일상을 살다가 푸근한 숲길을 걷다 보면 여기가 홍콩이 맞나 싶은데요, 아이 입장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일 거예요. 전에 큰 맘먹고 아이와 아이 친구를 데리고 3시간 반 동안 긴 등산 코스를 간 적이 있는데요, 그동안 두 아이가 하는 이야기와 질문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어요. 평소에는 엘리베이터, 버스 노선, 학교와 가게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이들이지만 그날만큼은 새, 나무, 꽃, 흙에 대해 쉬지 않고 묻고 이야기했지요.


예를 들어 저수지를 건너는 다리는 경치도 좋을 뿐 아니라 가장자리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볼 수 있는데요, 특히 한 다리 위에는 까만 바탕이 빨갛고 노란 무늬가 있는 큰 나비 무리가 자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항상 풀잎 위에서 쉬고 있는 나비들을 하염없이 구경하는 어린아이들과 옆에서 사진을 찍는 부모와 마주쳐요. 한 번은 산길에서 막 허물을 벗은 어린 나비들이 번데기 옆에서 옹기종기 모여 파르르 날개를 떠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답니다. 그 모습을 직접 본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지요. 시내에서 차로 10분이면 이런 자연의 시작점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 좁은 홍콩의 매력입니다.

나무밑동, 풀 한 포기를 보고도 뭐가 그리 신기한지 한참을 이야기 나누는 친구들입니다. 맘에 드는 나뭇가지라도 하나 주워들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즐거워하지요.


숲에 가면 반겨주는 사람도,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도 없고, 유일하게 만나는 사람들은 같은 목적으로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죠. 뭔가를 배우겠다거나 책을 빌려가겠다는 등의 목적의식도 없고, 다만 자연을 즐기러 왔기 때문에 여유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조용히 해야 한다거나 줄을 서야 한다는 등의 제한에서 거의 완전히 자유로워지고요. 크게 소리를 내거나 마구 뛰어다닌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대신, 체력을 소모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통제가 안 되는 아이도 거의 없습니다. 걷는 것만으로도 지치기 때문이죠. (보통 처음에 신나서 뛰어다니다가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합니다 ㅎㅎ) 다른 공간에 비해 이 점이 하이킹 코스가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해요.

지친 꼬마들. 쉬운 코스지만 초반에 힘을 너무 뺀 나머지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앉아 있다가도 다시 힘내서 열심히 걸었답니다.
가족 단위로 하이킹을 오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는데요,  보통 서로 가볍게 인사하고 각자의 시간을 즐기는 편입니다.

하이킹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들

복잡한 도심을 피해 숲길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일단 아무래도 바깥 활동을 중시하는 서구권 사람들이 무척 많이 눈에 띕니다. (어린아이를 품에 들춰 안고도 파워 워킹을 하는 걸 보면 '역시 저 인종은 나와는 다른가..'라는 생각이...) 코로나 이전에는 중국 본토에서 온 단체 관광객도 간혹 보였고요, 홍콩 현지인들도 가족 단위로 많이 놀러 나와요.


재미난 점은, 출신 문화권에 따라 마주치는 사람들의 반응도 참 다르다는 겁니다. 서양인들은 눈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도 하고 아이에게 말도 건네는 편이고요, 본토 중국인들은 주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큰 목소리로 많이 떠들어요. 이에 비해 홍콩 로컬 사람들은 참 무뚝뚝해 보입니다. 저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광둥어 라디오 방송이나 뽕짝(?)을 들으며 무심하게 걸어 다니기도 하죠. 그런데 코로나를 겪어 보니, 홍콩 사람들은 사스를 겪으며 기본적으로 낯선 사람들과의 접촉을 상당히 꺼리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어떤 택시 기사님들은 잔돈을 줄 때 제 손에 본인 손이 닿지 않게 공중에서 떨어뜨리기도 하더라고요.)


하지만 홍콩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참 친절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아이가 뛰어다니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무표정하게 있던 주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느샌가 다가와 일으켜 주셨고, 먼저 지나가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기도 했어요. 물론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경우가 있을 것이고, 개인차도 분명 있겠지요. 제가 아기를 가지고 낳아서 키우기 시작한 미국에서도 고맙게도 무수한 친절과 배려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약간 느낌이 다릅니다. 어른인 저에게는 세상 무뚝뚝한 분들도 아이들에게는 참 따뜻하게 대해주는 모습이 딱 ‘츤데레’ 같다고나 할까요?


사실 홍콩이라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복닥거리는 시내와 덥고 습한 여름 날씨만 놓고 보면 아이를 키우기 결코 쉽지 않은 곳 같고,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다채롭고 독특한 문화 환경과 인구 구성, 의외로 손 타지 않은 자연환경 등 살수록 재미있고 갈 곳 많은 곳이 바로 홍콩입니다.



조용한 아이에게 특히 추천해요

Family Walk의 혜택을 특히 크게 볼 수 있는 친구들은 누가 있을까요? 붙임성이 좋은 아이들은 집 앞 놀이터나 키즈카페에 가서 처음 보는 친구와도 잘 어울려 놀지만,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아이들은 또래 친구가 너무 많아도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오히려 조용한 숲에서 나무와 꽃, 곤충들을 관찰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훨씬 에너지 충전에 도움이 되겠지요. Family Walk은 모든 아이들에게 즐거운 경험이겠지만, 특히 자연을 사랑하는 내성적인 아이들에게 더없이 행복한 선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용한 시간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자연이 큰 선물이 됩니다.

한국도 도시가 발달하고 밀도가 높으면서도 산과 강이 어우러져 있다는 점에서 홍콩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미 여기서 소개한 Family Walk와 비슷한 등산 코스도 분명 많이 있을 것 같아요. 경사가 없고 포장이 된 길이라면 Family Walk 후보가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다양한 안전 조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홍콩의 경우 놀이터가 구비된 공원에서 자전거와 스쿠터 금지, 반려견 금지 표시를 항상 볼 수 있어요. (물론 이를 위해서는 별도의 자전거 도로와 반려견 전용 공원 등 별도의 인프라가 필요하기는 합니다.) 또 Tai Tam Family Walk의 경우 계곡과 저수지가 인접하기 때문에 산길 작은 틈도 촘촘한 펜스로 막아놓아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있습니다. 중간중간 간식을 먹을 수 있는 피크닉 테이블, 야생 동물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디자인한 청결한 쓰레기통, 안전 수칙을 열거한 안내문 등도 필요할 것이고요. 어른들이 다니는 등산로에도 구비되어 있듯 긴급 상황 발생 시 유용한 위치 표시판이나 핫라인 전화 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널찍한 야외 바베큐 공간(좌, 출처: hongkongextras.com)과 공원마다 설치된 스쿠터 금지 및 반려견 출입금지 표지판(우, 출처: hongkonghustle.com)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도심 속 캠핑 문화를 보며 한국 사람들도 복닥복닥한 도심을 벗어나 자연을 즐기고 싶은 욕구를 많이 느끼는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이의 눈높이에서 보면, 인위적으로 구획된 공간보다는 두 다리가 지칠 때까지 쉼 없이 걸어 보는 숲이 더 자연 체험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와 손을 잡고 걷다가 여기서 한참을 쉬어 갔습니다. 오래 오래 기억하고 싶은 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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