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닭똥집에 소주 한 잔 하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몇 없는 고향 친구다. 늠름한 육 세 아들의 엄마이자, 바이크 라이딩을 취미로 즐기는 남편의 아내이며 인상 좋고 성품 좋으신 두 남녀의 외동딸인 그녀는 가끔 읽던 책의 문구나 SNS에서 본 좋은 글귀들을 캡처해 내게 보낸다.
그녀는 나에게 각별하다.
스무 살, 여름방학 지나고 개강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었던 시기. 하필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사연 있어 보이고 싶었는지 내리는 비를 다 맞아가며 물 묻은 2G 폰 플립을 허벅지에 비벼 닦고, 별명으로 저장되어 있는 그녀의 연락처를 눌렀다.
목놓아 울며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지금은 안주거리로 전락했지만 아직도 생생한 걸 보면 힘든 시기이긴 했나 싶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혼자서도 안정적으로 잘 지내는 사람이라는데, 그게 바로 너야 라는 간지러운 카톡을 보내왔다. 캡처 시간이 밤 10시 06분인걸 보니 아마 술 한 잔 한 모양이다. 어쨌든 닭똥집 먹다 듣기 딱 좋은 따뜻한 말에 반 병만 마실 것을 한 병 깔끔히 비웠다. 몽롱하게 누워 말을 곱씹었다. 나는 과연 혼자서 안정적으로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아님 그런 척 모두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는 건가.
6월쯤이었나. 엄마가 된 이후 첫 밤마실에 나온 배터리 충전 안 하는 저 녀석과 아이가 셋인 애국자 친구가 만나 홀 수 모임이 성사됐다. 근 5년 만이었다.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면 고향에는 아직 없는 크리스피 도넛을 양 손 가득 사들고 시외버스를 탄다. 애기들이 좋아해야 할 텐데. 내가 애기 입맛이니 뭐 비슷하겠지 하며 도넛 이모를 자청한다. 고장 난 테이프처럼 반복되는 학창 시절 이야기를 깔깔 대다가 헤어질 무렵 빛의 속도로 카드를 내밀어 계산한다. 두 어머니들이 성화다. 왜 멀리서 온 니가 내냐며, 도너츠도 사 왔는데 계산까지 하냐며 제자리 널뛰기를 하더니 택시 타는 내게 얼른 삼만 원을 쥐어준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 셋 엄마는 3만 원짜리 기프티콘을 보내 놨다. 처음엔 더치페이를 한 것 같은 기분에 썩 서운했다. 내가 밥 한 끼 못 사는 사이인가 싶고, 그게 앞다퉈서 꾼 돈 갚듯 서둘러 줄 만큼 부담스러웠나 싶었다. 어린 나이에 일찌감찌 결혼해서 애기 엄마가 된 친구들에게 밥 정도는 내가 사고 싶었다. 그들은 본인 말고도 챙겨야 할 가족이 많으니까. 물론 혼자인 나랑은 댈 것도 없이 잘산다. 동네에서 가장 크고 비싼 아파트에 사는 아이 셋 엄마와, 스티커 사업을 시작해 많게는 월 800만 원의 순이익을 남기는 재능 많은 대표님. 사실 마음 한구석엔 그녀들에게 멋진 싱글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생 앞에 선 중3 느낌이다. 중학교에선 내가 짱인데 아직 갈길이 멀다.
안정적이라는 게 뭘까. 언제 오냐는 남편의 스윗한 카톡을 귀찮아하는 그녀와, 감시하듯 연락해오는 첫째 딸을 심드렁하게 받아치는 아이 셋 애국자는 분명 소속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내가 그녀들과 같은 소속감을 얻게 된다면 안정적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즐겨 타던 사람이 MTB로 바꾼다면, 캠핑 중독자가 텐트를 버리고 편안한 시몬스 침대가 있는 호텔을 예약한다면. 그들은 새로 얻게 된 안정감에 만족스러울까. 나는 아직 하이브리드를 버틸 수 있는 튼실한 엉덩이가 있고, 둥지로 가기엔 세상에 미련이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