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결혼하지 않는 이유
외제차가 사고 싶다. 옵션도 넉넉하면 좋겠다. 빛 지고 싶진 않다. 일시납으로 사고 싶다. 우선 12월에 이사 가는 전셋집의 대출금부터 갚아야 한다. 중간에 청약이라도 덜컥 되면 중도금에 잔금에 빚쟁이가 될 텐데. 하우스 푸어 말은 그럴싸하지 그냥 냄새만 좋은 생닭이다.
학수고대를 오래 하다 보니 세금 혜택에 유류비 지원까지 되며 마음먹으면 까짓 거 일시불로 살 수 있는 경차는 안중에서 실종 상태다. 드림카를 계산할 준비는 안되었고 지금 수준에 살 수 있는 차는 눈에 차지 않으니 어정쩡한 소비의 방지를 위해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 세 달 전쯤인가. A.K.A 중부권 최고의 쉐보레 영업사원에 트레일 블레이져를 찐하게 영업당했다. 갑작스러운 전세 계약으로 차를 사기 힘들어졌다고 하자 고객님은 할 수 있다며, 개별 소비세 할인과 각종 달콤한 것들을 제시해 나의 욕구를 응원했다. 그의 커리어를 생각해서라도 살까 싶었지만, 썩 내키지 않아 보류 중이다. 여름에 걸어놓은 계약금 10만 원은 쉐보레 장부 어딘가에서 겨울잠을 시작했다.
일찌감치 차를 샀으면 종류 상관없이 흰색이면 좋았을 거다. 부질없는 걸 알면서도 남들 시선을 의식한다. "그냥 경차나 사." 하는 말에 보란 듯이 너보다 좋은 차를 끌고 나타나고 싶다. 유치한 걸 알지만 마음이 마음처럼 쉬운 건 신의 영역이다. 여태 참은 거 끝판왕을 끌고 오리라 한다.
어쩌면 결혼하지 않는 이유다. "사내연애는 싫다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만나려고? 결혼은 해야지. 너 어린 나이 아니다? 막차도 놓치기 전에 그냥 어무나 만나봐" 곧이곧대로 들어야 하는데, 마치 두고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반감이 생긴다.
경차도 나쁘지 않다. 내 성에 안 차는 것뿐. 아무 나도 상관없다. 역시 내 성에 안 차는 것뿐. 단지 그 앞에 붙는 '그냥'이라는 단어에 지는 것 같아서 경차와 아무 나는 허용하고 싶지 않다. 나는 '못'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라 주장하고 싶은데 근거가 없다. 기승전결에서는 결과만 보고 싶어 하면서, 주장에는 근거를 악착같이 따지고 든다.
어느 정도 연애기간을 유지하다가 결혼하자는 뉘앙스가 풍겨오면 미적지근하게 웃으며 천천히 마음을 정리한다. 반대로 오래 사귄 연인이 미래를 약속하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면 그때도 마음을 정리하겠지. 집 정리는 엄마 올 때만 하는데 마음의 정리는 참 부지런히 도 한다. 어디선가 봤다. 짧게 만났는데 헤어지면 매력이 없는 거고, 오래 만났는데 헤어지면 끝까지 가기엔 애매한 거라고. 문득 듣게 된 Bro의 '그런 남자' 가사가 "뭔가 애매한 놈들이 자꾸 꼬인다는 건 너도 애매하단 소리야." 한다. 반박 불가했다. 암암리에 정해진 그 애매한 기준선에서 멀어지려면 열심히 뛰어야 한다. '신과 함께'의 나태 지옥 노예들처럼.
기세 좋은 어릴 적엔 달리지 않아도 그러려니 한다. 아이러니하게 숨만 쉬어도 힘에 부치는 나이가 되면 더 힘차게 달려야 한다. 결승선에 다 달아서 승리든 완주든 이뤄낸 이후엔 '보통의 경우'에 벗어나도 이유가 있겠지 한다. 반면에 머물거나 늦장 부리면 안 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잔뜩 만들어야 한다. 결혼을 안 하는 이유, 애를 낳지 않는 이유, 차를 사지 않는 이유, 집이 없는 이유. 누가 뭐라던 이유 따위 댈 내가 아니야. 나의 길을 가겠어. 하는 마이웨이 장인이면 생각할 것도 없이 몸 편한 대로 하자. 주변 시선을 무시하기 힘들고 인정을 즐기며 스스로의 미래가 불안한 나는 운동화 끈을 동여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