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360여 개의 오름이 있다고 해서 한달살이를 계획할 때 오름을 많이 가보자고 생각했었다. 내가 가보고 싶었던 검은 오름은 예약이 한 달 이상 밀려있어 포기하고 남편이 준비한 *이승이 오름을 가기 위해 집 앞 정류장에서 510번을 탔다. 하례초등학교 정류장에 내려서 보니 우리가 환승해야 하는 640번이 쓰여있지 않아 당황하면서 길 건너를 가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그래도 앱에서 알려줬으니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승이(악) 오름:살쾡이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잠깐 앉아있으니 640번이 꿈처럼 나타났다. 배차시간이 50분 만에 한 번씩이라고 하니 더욱 반가웠다.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앱 검색을 하던 남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센스 있게 버스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든 나를 칭찬하면서 와이프가 똑똑해서 다행이라는 둥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
종점 휴애리 공원에 잘 도착해서 이승이 오름 가는 길을 찾으니 아뿔싸 도로를 800m 걸어가서 다시 1km 이상을 걸어가야 이승이 오름 주차장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오름은 시작된다고 했다. 허둥지둥하는 남편을 보다가 마침 내려오는 택시를 불렀다.
나는 이승이 오름 주차장까지 택시로 가려고 했지만 남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승이 오름은 밑에서부터 걸어가는 길이 멋있다고 하면서 도로를 벗어나 벚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길에 이르자 내리자고 했다. 겨우 800m 올라오느라 택시를 탄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차들이 계속 다니는 도로를 걸어오는 것보다는 기본요금 정도면 올라올 수 있는 택시가 고마웠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며 보니 중산간 마을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길 옆으로 자라나는 나무들과 이름 모를 꽃들과 풀. 별로 꾸미지 않은 얼굴처럼 자연스럽다. 벚나무가 양쪽으로 심어져 있어 봄에는 벚꽃으로 화사했을 것이고 초록잎이 무성했을 때는 푸르름을 한껏 뽐냈을 텐데 지금은 잎이 모두 떨어져 하얀 가지들만 있어 호젓한 멋이 있다. 벚나무의 잎도 가을이면 물들어 아름다울 텐데 이곳은 일찍 물들어 떨어지는지 이상하게 하나도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지금 이 모습도 좋다. 함께 걷는 이 가 있으니.
이승이 오름으로 가는 중산간 마을 길
걷는 사람들이 없어서 마스크 벗고 중산간 길을 열심히 걸으면서 소들이 있는 목장지대를 지나고 야외웨딩 사진을 찍는 커플도 보면서 이승이 오름 이 시작되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한라산 둘레길과 연결된 길인 듯 표지판이 중간중간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이승이 오름은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과 이끼들로 오르면서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없고 산속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구조였다. 그러나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멀리 한라산과 부근의 오름들과 어우러진 모습들이 보이는 멋진 길이었다.
이승이 오름의 전망대에서 보는 한라산과 주변의 오름들
한 시간여를 오르고 내리면서 한라산 둘레길로 가지 않는 경우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내려오면서 준비해 간 간식을 먹고 이승이 오름을 오른 거리만큼 걸으니 마침 623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에 타고 들어온 버스는 아니었지만 버스를 타고 휴애리 동네 구석구석을 투어 했다.
마당 가득 귤나무가 있는 집들을 보면서 부러움이 한가득이다. 새로 신축한 멋진 집들도 있고, 전통적인 돌담집들도 있는 귤 향기만큼 정겹고 아름다운 휴애리 마을의 골목골목을 구경했다. 623 버스 덕분에 생각지 않게 일부러 가기 힘든 서귀포 마을 투어가 끝나자 버스는 쇠소깍으로 이어졌다. 거기서 내려서 놀고 가자는 남편의 말을 못 들은 척 거절하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중앙로터리에서 내려 어제 못 먹은 '안거리 밖거리'별다섯 개의 맛집을 찾아갔다.
다행히 식당은 영업 중이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하필 3시 15분이었다. 3시 30분부터 5시까지 쉬는 시간에 임박해 들어갔으니 종업원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래도 15분 전이라 주문을 받아줘서 남편이 별 다섯 개짜리 맛집이라고 극찬하던 밥을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밥 한 공기를 추가로 주문해서 둘이 나눠먹었다. 옥돔구이도 맛있고, 풀치볶음(무침)이 참 맛있었다. 다른 반찬들은 깔끔 평이했다.
1인당 1만 원의 값이면 괜찮았다. 더하여 종업원의 상냥한 미소만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러나 본디 말투나 생김이 그런 사람이겠지 하며 이해했다.
다시 이어지는 이중섭거리로 올라오면서 모자도 하나 사고 핸드폰 넣고 다니는 작은 퀼트가방도 동생것까지 두 개 사고, 건너편 올레시장 구경하다가 남편이 사고 싶어 한 이태리 목욕타월도 하나 산 후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늘 버스를 타고 다녀서 정류장 이름도 많이 익숙한 현지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