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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옥 Jul 05. 2023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사려니 숲길)


'사려니숲길'을 가기로 하고 여유 있게 나와서 101번 직행버스를 터미널에서 9시쯤 탔다. 남원 환승장에서 132번으로 갈아타고 '사려니숲길, 붉은오름 앞에 내렸다. 숲길로 들어가면서 보니 삼나무가 죽죽 뻗어 올라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울창한 삼나무 사이의 데크로 이어진 길에서 나와 붉은 화산송이가 깔린, 길게 이어지는 숲길로 들어갔다. 걸으면서 잠깐씩 사진을 찍다가 오늘은 사진을 많이 찍지 않기로 했다. 끝을 모르게 높이 자란 주인공 삼나무들이 이끌어주는 숲에서 나무들과 호흡하며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붉은 화산송이로 되어있는 숲길은 걷기에도 상쾌하다. 피톤치드 가득한 삼나무 숲을 계속 걸어가다 보니 안내팻말에 '물찻오름', '붉은오름' 표시가 되어있다. 붉은오름은 사려니 숲길을 나가서 다른 길로 가야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지 않게 오름을 오르게 되어 다행이다 하는 생각으로 계속 걸었다.

사려니 숲길의 시작은 빽빽한 삼나무와 붉은 화산송이 길

어느 정도 걸으면 오름입구로 들어가는 안내팻말이 보일 법도 한데 계속 앞으로 이어지는 표시만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표시를 믿고 계속 올라갔다. 어느덧 빽빽한 삼나무 숲을 벗어나 삼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기타 여러 종의 나무가 섞이며 숲이 다양해졌다.


길은 험하지 않고 붉은 화산송이 길에서 시멘트길이 되었다가 자갈길이 되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올라가니 '물찻오름'으로 가는 입구가 보인다. 그러나 입구에는 12. 31. 까지 입산금지가 되어있다. (지금은 입산이 가능해졌기를.)그리고 더 이상 붉은오름의 안내팻말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생각대로 붉은오름은 일찍 사려니 숲길을 나가 다른 길로 올라야 되는 것이 맞는 생각이었다.


사려니 숲길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던 나는 중반을 지나자 길이 언제나 끝날까를 생각하며 살짝 지루해지려고 할 때 숲길에 있는 시비를 발견했다. 촘촘하게 돌에 새겨진 시귀를 읽으려 다가서니 도종환 시인이 쓴 '사려니숲길'이었다.


'어제도 사막 모래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리 십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중략......../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무심하게 회색의 대리석에 새겨진 그의 시를 읽다가 먼저 이 길을 지나간 시인의 마음이 툭! 내게 들어왔다.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숲길. 그제야 시인의 마음이 되어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펼쳐진 길을 다시 보았다. 길 양쪽으로 죽죽 뻗어있는 나무와 그 사이에 함께 자라는 키 작은 나무들과 간간이 보이는 들꽃과 나무들 사이의 푸른 하늘과 스치는 바람을.


그리고 35년 이상을 함께 걸어온, 때로는 울퉁불퉁한 말투로 나를 서운하게도 했던, 그러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따뜻한 눈빛과 미안한 맘으로 수줍게 상황을 얼버무리는 친구 같은 남편과 함께 이 숲길을 걸을 수 있으니 참 좋구나 하는 고마운 마음을.


걷는 게 조금 힘들어 숲길이 끝나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이 길을 다 걷고 돌아가 시간이 흐른 뒤 오늘을 추억할 때는 시인의 말처럼 문득 짐을 싸서 이곳으로 달려오고 싶은 길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묵직했던 다리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숲길을 걷다가 한쪽에 오래된 돌들과 나무사이로 흐르는 작은 계곡을 보았다. 물도 적당이 많아 흐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리고 운 좋게 걸으면서 숲 속의 '고라니'도 보았다. 그런데 너무 기뻐서 고라니를 촬영하려고 했더니 재빠르게 잡목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냥 모른 척 숲 속의 친구처럼 지나갈 것을. 아쉽고 미안하다.

고라니가 함께 걷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와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을 간간이 마주치면서 제주시 사려니 숲길 입구(출구)에 도착했다.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이어 펼쳐진 사려니 숲길은 서어나무와 삼나무, 편백나무, 때죽나무, 그리고 단풍나무까지도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곶자왈 나무 숲이다.


서귀포 쪽에서 시작된 길은 평지에서 시나브로 올라가는 길이라  더 좋았고 제주시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라 편했다. 제주시에서 시작해서 걸어오시는 분들은 반대로 경사가 약간 있는 고갯길을 올라와야 해서 초반에는 좀 힘들어 보였다.


숲길을 15km 정도 걸었지만 몸과 마음이 가볍다. 간간이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걸으며 숲이 주는 신성한 기운을 받은 덕일까.


제주시의 사려니 숲길 입구는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울창한 삼나무길이 차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어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더구나  차도를 건너면 바로 한라산 둘레길이다.  그러나 둘레길에 대한 호기심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있어  뒤로 미루고, 숲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교래에서 내려 다시 서귀포로 가는 버스를 탔다. 몰려오는 허기를 잡아줄 식당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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