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술버릇은 극단적이다.
끝없이 주거나, 잠들어 버린다.
함께 마시는 이가 못해 본 경험이 있다?
쓰러지기 전까지 해줘야 한다.
못 가본 장소, 못 마셔본 술
다 해주어야 직성이 풀린다.
나의 즐거움을 위함이라 여겼으나
어쩌면 술버릇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잠들어 버린다.
이런 말을 하기엔 좀 미안하지만
흥미를 잃고 불필요한 자리라 느껴지면
몸이 먼저 반응하고 전원을 꺼버린다.
지극히도 효율적인 이 친구가
가끔은 야속하게 빠를 때가 있다.
비교적 얌전하다 할 수도 있으나
반복되는 버릇은 종종 곤란하다.
반대로 떠올려 본 적이 있다.
이 말을 꺼내면, 당장 하려고 하겠네?
걔는 술 마시다가 잘 걸.
음.. 말을 아끼게 되고
함께 하고 싶지 않다.
물론 각각의 상황에 맞추려 하겠으나
어찌 내 마음대로 될 수 있겠는가.
술은 그런 녀석이니까.
때문에 나는 술을 경계하여
홀로 마시는 횟수가 늘었다.
혼자 마시는 술만의 매력이 있다.
처음에는 처량함을 안주로 삼아보고
언젠가는 스스로를 자축하며 마시고
어느 날엔 그 자체의 맛을 즐겨 본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점은
무리해서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
속도도, 양도 스스로 조절이 되니
몸이 과하게 힘들 일이 적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버릇이 되어 보니
아무 감흥 없이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정직하게도
몸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나는 왜 술을 마시고 있지?
이 질문이 떠오르고
수많은 답변이 지나간다.
퇴근 후 맥주 한 잔.
삼겹살엔 소주.
목마르니 시원하게.
모든 이유들이 논리적이고
각각의 매력이 느껴졌다.
다만, 불가능한 이야기인가?
이 역시도 논리적으로 옳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눈 떠 있는 시간 동안 마실 게 필요하다는 것.
당연히 맥주와 소맥을 마시던 자리에
새로이 채워줄 것이 필요했다.
알다시피, 보리차를 새로운 친구로 만들었고
또 다른 매력으로 나를 흡수하고 있다.
술버릇이 있듯, 차버릇도 생겼다.
뜨거운 차는 천천히 마셔야 하며
물을 계속 끓여줘야 하고
우러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퇴근 후 샤워하기 전에
물을 끓이기 시작하고
샤워 후 텀블러에 물을 따라
우러나는 시간을 가진다.
동시에 책상에 앉아
글을 적기 시작한다.
맥주의 한 모금에 캬 를 뱉으며
유튜브를 헤매던 나는
뜨거운 김이 나는 보리차의 향을 맡으며
글을 적기 시작하는 내가 되었다.
그렇다.
보리차 향기가 나면 글을 써야 할 것만 같다.
심지어 직장에서도 보리차 향이 나면
짧게라도 생각을 적어야 하니.
이게 차버릇이 아니면 무엇일까.
매 번 글을 써내지 못하니
멍 때리는 시간도 생겼다.
새삼 느껴보는 건
그리 오래 멍 때릴 수는 없더라.
무언가 하지 않는 그 시간을
몸은 견디지 못하는 듯 행동하려 한다.
때로는 긴 시간에 걸쳐
오락가락하고 있지만.
다행인 점은 그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
텀블러 한 잔이 비어 가면
대개, 나는 글을 적기 시작한다.
아직 아쉬운 점은
혼술처럼 혼차만 해봤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으며,
차 한 잔 하시죠.
스스로도 조금 낯간지럽다.
뭔가, 무거운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술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들도 물론 소중하다.
다만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어떨까.
나의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하거나
혹은 원래 차를 즐기는 사람과의 대화는.
기회가 된다면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술버릇은 처음에 잘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취하면 몸이 기억한 것을 반복하기에, 그렇다.
차버릇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잘 세팅해 두면, 몸이 기억한다.
때때로 우리는 습관을 만들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노력을 하고 있다.
관성을 이겨내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기에.
관성에 지배당한 삶을 살던 내가
거짓말처럼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건.
어쩌면 사소한 마실 것의 변화로 시작했다.
습관 자체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면
그 습관으로 이어질 트리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보리차와 글쓰기를 연결시켰듯,
어느 날엔 매실차와 무언가를 연결시킬지도.
사소한 행동의 변화는
꾸준한 습관으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