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엄마를, 할머니를 원장님이라고 부른다.
“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자신이 천하게 난 것을 스스로 가슴 깊이 한탄하였다.”
홍길동전을 읽었을 때 뼈 때리듯 와닿았던 문장이었다. 나에게 적용하자면,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했다."라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내가 홍길동처럼 서자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천하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항상 아이들로 북적였다. 우리 집이 공부방이었고, 놀이방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놀이방이란 호칭은 추후 어린이집으로 정식 변경이 되어 사업장으로써 분리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 삼 남매에게는 엄마가 선생님이자 원장님이었다.
"엄마, 나 이제 핸드폰 뒷번호 바꿀 거야. 서운해하지 마"
어느 정도 내가 어린이집 일에 있어 자신감이 붙었을 때 이야기한 말이다. 예전에는 핸드폰을 개통할 때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 뒷번호를 동일하게 했었기에 뒷번호를 바꾼다는 게 서운한 일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당시 남자친구도 우리 가족 뒷번호였기에 나만 바꾼다는 것은 큰 결정이었다. 나에게 뒷번호를 바꾼다는 행위는 본격적으로 어린이집 체계를 잡아가며 주임 교사로서 프로의식을 발휘하고자 하는 직업정신의 의미였다.
"어머님, 정말 신기한 게 시키지도 않았는데 원장님을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아요. 3살이면 할머니라고 부를 법도 한데 할머니가 일하고 있는 줄 아는지 자기도 교실에서 노느라 바빠요. 마주치면 흔연히 자기 놀이를 하느라 할머니라고 막 따라가지도 않아요."
첫째 딸이 3살이 되던 해 부모상담을 하게 된 담임 선생님의 말이었다. 2살 때부터 할머니의 어린이집으로 보내면서 집에서는 할머니라고 "함미, 함미" 하는데 어린이집에서는 "원자밈, 원자밈 (원장님)" 하며 부른다는 것이었다. 이어서도 둘째 딸은 0세부터 할머니의 어린이집으로 입소시켰는데 큰딸과 다를 바 없이 분리된 어린이집 생활을 너무 잘하고 있었다.
초반 과정에서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삐그덕거린 적도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가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며 일하고자 했던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테다.
첫째 딸이 한글을 잘 읽게 된 어느 날, 전화 오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 물었다.
"엄마, 원장님이 누구야? 여기 전화 왔는데 원장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