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히 반항하는 딸이었다.
"원장님 딸이지?"
나는 이 말이 제일 싫었다.
반항심? 사춘기에는 누구나 퉁퉁거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가족 간의 원만한 소통으로 이상적인 가정도 있겠지만, 나 역시 사춘기 시절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감정을 앞세워 대응하곤 했다.
"너는 엄마가 어린이집 운영을 하시니까 문과겠네."
"아니요? 저 이과 갈 건데요? 전 과학이 좋아요. 그리고 엄마는 엄마고, 저는 저예요"
"엄마! 어릴 때 찐 살은 크면 빠진다며! 아무래도 아닌 거 같은데?"
"엄마가 사준 화장품은 더 번들거리는 거 같은데? 이래서 여드름이 없어지겠어?"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말에 오기로 문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빠지지 않는 살에 성장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대로 다이어트와 운동을 했다. 오죽하면 남들 죽어라 공부하는 시기에 우리 반 여학생 체력장에서 오래 달리기 부분에서 1등을 했다. 또 한 번은 엄마가 사준 화장품을 거부하다가 이마에 여드름이 우후죽순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무서워서 결국 엄마가 사준 고가의 화장품을 받아들여 3년 이상이나 눈치를 슬슬 보며 조달받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엎치락뒤치락 주도권을 쥐락펴락하며 줄다리기하듯 지냈다.
모범생으로 오해받기 좋은 동그란 외모였지만 고등학생 시절 1년에 한 번씩 귀를 뚫었으며, 코인 노래방에 처박혀 있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전략적이지도 않으면서 세상 모든 일에 호기심 많았던 나는 어렵사리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지원을 했었나 싶었을 정도로 생뚱맞은 입학을 했다. 그 당시 합격 소식이 들리지 않았으면 아빠의 지시대로 공무원 시험이나 친구들이 같이 준비하자던 재수 생활을 했을지 모른다. 이과 출신이라 소프트웨어학과로 입학하긴 했으나 내가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시간이 꽤 되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추측하기로 그 당시 부모님의 바람에 크게 어긋나는 상황이었으나 역정을 내시거나 나를 비난하지 않으셨다.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엄마가 한 가지 제안했다.
"1학년 때 1년만 보육교사 교육원 오후반으로 자격증만 따놓자, 혹시 몰라 따놓기만 하는 거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야. 그래도 1학년 때가 시간을 활용할 수 있을 때니까. 그 자격증만 따놓으면 그 이후로 너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아무 상관하지 않을게. 그리고 입학 전에 운동하고 싶다고 했지? 회원권 끊어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 멀리 보았을 때 너한테 손해 있는 건 절대 아니잖아. 혹시 몰라 따놓는 거다!"
며칠 고민할 겨를이 없는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답만 하면 돼.)'의 상황이었다. 오케이, 그렇게 대학교 1학년 생의 시간표는 1교시 부터 6교시, 주 4~5일로 꼼꼼히 배치되었다. 오후 6시부터는 교육원으로 부리나케 출석하였다. 교육원 출석기준에 가까스로 맞추었지만, 조별 활동이나 방학을 이용한 실습 등 놓치지 않고 참 열심히 참여했다. 대학교 내에서도 동아리도 하고 선배들이 교수님 연구실로도 이끌어 주기도 했으며, 2학기에는 심지어 관심으로 들었던 회계학원론에 전과까지 강행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문과생이 더 잘 어울렸을 수도 있었다.
정말 열심히 살았던 대학생 시절, 3학년이 되니 배낭여행 비용과 그 당시 도전하고 싶었던 시험의 응시료를 모으기 위해서 카페알바도 해보았지만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8월부터 교사가 그만둔다는데 걱정이다. 당장 2주 후에 누가 출근하겠어, 가뜩이나 휴가철이잖아."
엄마가 다른 원장님과 통화하는 말에 내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딴에는 머리를 쓴 셈이었다.
"엄마, 내 자격증으로 근무할 수 있지? 1학기만 휴학해서 한 해 마무리하는 조건으로 월급 좀 받고 싶은데."
그렇게 어린이집에 정교사로 발을 들였다. 내가 데리고 있던 아이들과 함께 교사로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첫 해 보았던 아이들이 0세부터 길게는 6~7세까지 나와 함께 했기에 아이들 돌봄은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장 딸이란 타이틀로 인해 교사 사이에서 험담은 기본이고 따돌림도 당해보며 나의 정식 사회생활은 시작되었다. 남들은 편안하게 일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낮잠 시간에 아이들 재우며 같이 누워 울며 버텨냈다.
처음엔 ‘여길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이었다가 점점 일하는 동안 '내가 엄마의 어린이집을 지켜야겠다.'라는 사명감이 점점 커졌다. 그 이유는 전국적으로 어린이집에 '평가인증제도' 뿐만이 아니라 '보육통합시스템', '어린이집 회계관리 사업', ‘평가제’ 등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전산화, 회계 의무화, 국가적 어린이집 평가제도가 실시된 것이었다. 이 사업들을 통과해야 말 그대로 어린이집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 번은 평가인증을 준비할 시기에 같이 일하던 교사가 무단결근을 했다. 그 교사의 어머님도 행방을 알 수 없어 오히려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입장이었는데, 그 몫은 고스란히 내가 다 떠안아야 했다. 내 성격상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위기 상황에서 나의 일방적인 감정싸움이나 일의 버거움에서 전이되는, 예를 들면 엄마 탓 같은 감정적 대응은 에너지 소모전에 불과했다. 한 명이 없더라도 평가인증을 통과해야 할 목표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초반에 평가인증 준비에 있어서는 교실 환경은 물론이고 서류 등 각 어린이집의 체계를 잡아야 할 중요한 때여서 내 손을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우리 아이들이 지내야 할 어린이집 살림이었으니까 꼼꼼하게 진행해야 했다.
며칠간 새벽 버스를 타고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의 ‘미라클 모닝’을 실천했던 시기였다. 아이들이 있을 때는 서류를 마음 놓고 할 수 없어 도망간 교사의 몫까지 하려면 새벽, 밤으로 나누어 일을 해내야 했다. 그렇다. 업무 과중의 불만은 원장 딸로서는 표현할 수는 없었다. 마땅히 해내야 할 반(半) 운영자 마인드로 지내는 위치였다. 그 이후에는 엄마의 연합회 및 대외활동의 개인 수행 비서 활동도 내 몫이었다.
그렇게 나의 배낭여행의 꿈은 날아갔다. 누가 시키지 않은 온전히 나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취업계를 활용해 무사히 졸업하고 잔잔히 쌓인 월급으로 '아동학사' 공부를 시작하였다. 한 단계씩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주임 교사 경력을 바탕으로 엄마와는 별도로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되었다.
"원장님 딸이지?"
나는 여전히 이 말이 싫다. 그렇다고 집에서 엄마 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함께 일했던 시절이 엄마와 제일 재미있었던 추억으로 지금도 한 번씩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순전히 외부에서 보이는 '원장 딸'이라는 시선이 제일 거부감이 든다. 선입견으로 생기는 시선의 잣대를 나에게 들이대지 말라는 조용한 반항아였다.
"눈빛이 닮았어요."
내가 어느새 엄마와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