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INFP 성격유형(내가 속한)을 두고 '선택적 공감러'라고 조롱하듯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이 연결지을 수 있을 만한 일이면 세상에서 공감을 제일 잘하는 양 굴다가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는 거의 사이코패스처럼 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표현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게다가 그 사람도 온라인 상에 올리는 글이라서 더 격하게 말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라서 찔리기도 했고 흥미로웠다. 나는 나의 안 좋은 면을 발견하면 흥미로워하며 고찰하는 편이다(그래서 누가 내 뒷담화를 할 거면 제발 앞에서 말해줬으면 하는 변태적인 면이 있다). 그래서 어느 부분이 찔리는지 또 깊이 고민해보게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 나는 분명 위로를 잘 못하는 사람이다. 위로를 잘 못함을 넘어 지지리도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겐 늘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상대이다. 그런 면에서 선택적으로 공감하는 사람인 건 맞다. 그러나 항변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공감을 못하는 게 대상이 되는 상황 때문은 아니다. 겪어보지 않은 일이라고 무조건 공감을 못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내가 아이를 안 낳아봤다고 해서 산후우울증을 위로하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겪은 예로 나는 승진 누락을 당해본 적도 없지만 억울하게 승진 기회를 빼앗긴 친구의 일에 분노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공감하고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먼저, 내가 감정의 선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마감 시간에 쫓기는 공포심을 가리키는 구체적인 단어가 있는 독일어 같은 언어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처한 상황은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감정 단어를 조합하면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일을 겪어 처음에는 슬펐다가, 나중에는 분노했다가, 허무해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을 수도 있고 그 길을 잘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나라도 그랬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정말 그랬겠다는 공감을 전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에게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보다는,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감정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공감을 잘하는 편이다.
다음으로, 그 사람의 우선순위를 알 만큼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날강도에게 지갑을 소매치기당했을 때, 그 안에 든 돈을 잃은 게 더 슬픈 사람이 있고 아끼던 지갑 자체를 잃은 게 더 슬픈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아쉽지만 새 지갑을 살 기회라고 룰루랄라 털어버릴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선행 정보가 있어야 나는 어떤 부분에서 위로를 전할지 가늠할 수 있다. 어떤 모르는 사람이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나는 질문부터 할 것 같다. '얼마가 들어 있었나요? 그 지갑은 아끼던 거였나요? 당신에게 돈은 얼마나 중요한가요?' 이런 질문 끝에서야 자연스러운 '아이고'가 나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 털어놓는 고민이나 불만이 좀 재미있어야 한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못됐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같은 수위의 고민을 말해도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하는 사람에게 더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다. 왜 우리가 주변인의 슬픔보다 영화 주인공의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겠는가. 이야기를 극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감정선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끌고 가는 사람에게는 설득력이 있어서 나를 납득시킨다. 그러면 잘 모르는, 나와는 감정이 다를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이 사람은 그럴 수 있었겠구나!'하면서 공감이 가고 위로도 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조건이 달리지 않아도 멋진 위로를 전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겠지. 진정한 어른이라고 생각해서 존경스럽다. 그러나, 나도 누군가에겐 분명 찰떡 같은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정도만 되어도, 아무에게도 위로를 줄 수 없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나 셀프 위로를 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