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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통에 빠진 추억

안녕, 나의 한옥집을 읽으며 소환되는 기억들

by 꿈꾸는 유목민

나는 과수원집 손녀딸이었다. (14명의 손주들이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과수원을 팔기 전까지 (우리 엄마 몰래)

나는 '나 과수원집 손녀딸이에요'하고 다녔다.

일곱 남매 중 셋째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24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온 엄마와 세상에 나온지

1년정도 된 나를 데리고 할아버지께서 받으신

퇴직금으로 차린 과수원으로 들어가셨다.

과수원은 꽤 넓었고, 사과, 복숭아, 배를 제철마다

기르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아... 그리고 소도 키웠다.


스물 네 살, 그 때의 엄마를 생각하면 안쓰럽고 안타깝다.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떼가면서 지은 밥과 찬을 끼니때마다

시부모님께 올리는 생활을 하셨고,

아버지는 동생이 태어나기 전 사우디아라비아로 노역을 가셨다.

두살터울 나는 동생을 들쳐업고,

나의 손을 잡은 모습으로 엄마는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내셨다.

엄마에게는 힘든 기억이었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과수원과 맛났던

꿀 사과, 천도복숭아, 배같은 과일,

그리고 아장아장 걸을 때 하나씩 따먹으러 다니던 앵두나무 길,

끼니때 엄마 심부름으로 할아버지를 과수원 어디메 찾으러 다녔던 기억등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안녕, 나의 한옥집'을 읽으면서 물론 작가의 추억들에 대한 입담도 재밌다 생각했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어린시절을 소환해준다는 감성적인 부분을 터치한 책이었다.


나의 시골집은 집 뒤로 산이 있고,

그 산이 모두 사과나무, 배나무, 복숭아 나무로 둘러쌓여있었다.

집 옆앞으로는 개울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가재가 살 정도로 깨끗했던 곳이다.

소도시로 이사를 간 후에 방학마다

시골집에 와서 그곳에서 사촌들과 피래미도 잡고,

가재도 잡고 놀았던 기억은 소중하다.


그 당시는 시골집 뿐 아니라 일부 소도시의 집들도

대부분이 푸세식 화장실 (재래식 화장실)이었었는데,

나의 시골집 푸세식 화장실은 집에서

어린이 발자국으로 약 10발자국 남짓 떨어져있었을 것이다.

물론 밤에는 요강이 준비되어있지만,

잠들기 전까지는 푸세식 화장실에 꼭 가야했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된 어느 여름방학,

어김없이 시골로 놀러갔고 그곳에는 나보다 한 달 빨리

태어난 여자 사촌이 있었다.

(그 해는 딸만 셋이 태어났더라는)

우리는 한달씩 터울이 있지만 사촌이기 때문에 서열이 있어서

난 꼭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은하언니와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고,

원래는 서로 밖에서 망을 봐주고

(안녕, 나의 한옥집에서처럼 빨간휴지 줄까, 파란휴지 줄까의 귀신이 나올까봐)

서로 따로 볼일을 봤는데 그날따라 왜 그랬는지,

같이 화장실이 들어갔다.

푸세식 화장실 구조는 커다란 다라이를 땅에

묻고 나무 판자를 양쪽으로 걸쳐놓은 구조였는데,

그곳에서 같이 볼일을 보려고 한 것이다.


은하언니가 앞에 자리를 잡고,

내가 뒤에 자리를 잡는 순간,


나의 한쪽 다리가 변기 안으로 푹! 빠지고 말았다.

나의 온 몸은 똥냄새로 가득찼고,

나의 모습을 보신 할머니는 기함을 하셨다. 개

울에서 몸을 어떻게 씻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할머니께서는 시장에 가셔서 하얀 가래떡을 뽑아오셨다.

원래 똥통에 빠지면 몸의 독을 빼기 위해서

하얀 가래떡을 먹어야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 생각하면 왠지 논리에 맞지 않은 것 같지만

그당시 나는 똥통에 빠지고 할머니께서

나를 위해 지어오신 하얀색 쫄깃쫄깃 가래떡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있다.


똥통에 빠진게 자랑스럽기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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