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조선통신사가 닛코로 간 까닭은?

조선통신사 사건사고 1-11

by 구경래

11. 통신사가 닛코로 간 까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임진왜란이 서둘러 종결된 뒤 일본에서는 차기 권력을 둘러싸고 큰 내전이 벌어져.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도요토미 가문과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쿠가와 가문의 싸움이 그것이야.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기선을 잡고,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1593~1615)를 오사카성 전투에서 물리친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는 비로소 도쿠가와 바쿠후 즉, 에도 바쿠후 시대를 열게 돼. 그러다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게 되지.


이에야스가 죽은 후 에도 바쿠후는 고민에 빠졌어. 왜냐하면, 비록 전국을 통일하긴 했으나 여전히 권력 기반이 공고히 다져지지 않았던 에도 바쿠후는 도쿠가와 쇼군의 정통성과 에도 바쿠후의 힘을 나라 안팎으로 널리 내보이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에도 바쿠후를 연 이에야스가 죽음을 맞이하자 곧장 그의 사당을 크게 짓기 시작해. 그게 바로 닛코에 있는 동조궁 곧, 일본말로 도쇼구야. 그러니 닛코에는 에도 바쿠후를 연 도쿠가와 쇼군의 뿌리인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어.


사당을 크게 지으면서 에도 바쿠후는 이에야스를 신처럼 떠받는 거야. 그리고 닛코의 이에야스 사당에 들러 그를 기렸지. 그래서일까 에도 시대엔 수많은 일본인의 평생소원 중 하나가 일생 중 한 번이라도 닛코를 방문하는 것이었다고 할 정도야. 오늘날도 닛코는 도쿄 인근의 유명한 관광지로 손꼽혀. 도쿄 근처의 후지산이 일본 화산과 온천의 상징이라면 닛코는 일본 자연과 문화유산의 상징이라고 할 정도니. 다만,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상대적으로 후쿠시마 원전과 가까운 닛코인지라 관광객이 확 줄어들긴 했대.


하여튼, 그렇게 이에야스 사당을 크게 지은 후 에도 바쿠후는 전국의 모든 다이묘에게 명령을 내리게 돼. 즉, 앞으로 통신사가 조선에서 일본으로 오게 되면 통신사 맞이와 접대에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최선을 다하라고 일렀지. 쇼군을 대하듯 모시라고 했을 정도야. 그래서일까 1636년 사행에 나선 통신사 일행은 유난히도 접대를 잘 받았대. 그런데 왜 하필 그 시점에 쇼군은 통신사 접대에 빈틈없이 하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지나가는 이야기 삼아 조선 시대의 평균 수명에 관해 좀 알아볼게. 사실, 조선 시대의 평균 수명에 관한 사료는 지금까지 남은 게 별로 없어. 왜냐하면, 왕이나 고위 관료 혹은 유명한 사람이나 족보가 잘 보존된 집안이 아니라면 조선 때 어떤 사람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거든.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어느 정도 오래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는 거지. 그래도 궁금하잖아, 평균 수명이 대략이라도 얼마쯤인지 말이야. 그래서 조선 시대 사람의 평균 수명을 추정해 본 사람이 있어. 지난 2013년 12월 26일 연합뉴스에 난 기사를 보면 돼.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란 기산데, 그에 따르면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가 쓴 수명 이야기를 보면 생몰연대가 확실한 조선 시대 국왕 스물일곱의 숨진 나이를 보니 평균 나이가 46.1세며,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볼 때 당시 조선 백성들의 평균 수명은 35세 내외 혹은 그 이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 자료가 나와. 실제로 국제연합(UN)이 발표한 각 나라의 평균 수명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1950년대 초반에는 평균 수명이 불과 47.92세에 불과해. 그러니 조선 때 수명은 그보다 더 짧았다고 짐작 가능해. 즉, 조선의 평균 수명은 마흔을 넘기기도 쉽지 않았을 거야. 참고로,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에 발표한 평균 수명 순위를 보면 여전히 일본이 83.7세로 1위, 우리나라는 78.8세로 11위로 껑충 뛰어올랐음을 알 수 있지. 하여튼, 조선 때 사람은 오늘날 사람보다 수명이 훨씬 짧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어.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갈게. 그렇다면 왜 일본의 쇼군은 느닷없이 이에야스 사당을 건립한 그즈음에 통신사를 잘 응대하라고 특별히 당부했을까? 사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죽고 죽이는 잔인한 전쟁을 치러 원수처럼 여기는 감정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때잖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봐. 1636년이면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으로부터 약 40년쯤 흘렀잖아. 한 세대가 흘러 두 세대를 향해 흐른 셈이지. 게다가 그때만 해도 사람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으니 거의 두 세대가 흐른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면 뭔가 슬슬 시동을 걸어도 될만하다고 생각했겠지? 평화의 사절단인 통신사를 활용해 뭔가를 꾸미고 싶었던 거야. 대체 그게 뭘까?


때는 1636년 12월 10일, 에도까지 머나먼 여정을 한 통신사가 국서전달을 사흘 앞두고 에도에 머물 때야. 뜬금없이 쓰시마 영주가 통신사 삼사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전했어.


“정사 어른! 우리 쇼군께서 닛코로 유람을 한번 다녀오라고 권하십니다!”

“아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우리가 일본에 온 것은 우리 임금님의 뜻에 따라 쇼군에게 국서를 전달하러 온 거지, 한가로이 놀러 온 게 아니잖소? 그런데 갑자기 닛코란 곳으로 유람을 다녀오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쇼군께서는 세 사신이 꼭 닛코에 들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삼사께서 닛코로 가지 않으면 저희 쓰시마가 아주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쇼군의 명령을 어기게 되면 쇼군께서 저희를 가만둘 리 없습니다. 너그러이 헤아려 주십시오!”


이제 일본 에도 바쿠후의 속셈이 뭔지 감이 잡히니? 맞아! 에도 바쿠후는 통신사의 닛코 유람이 실현되면 쇼군과 에도 바쿠후의 권위를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널리 드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멀리 조선에서 온 통신사가 닛코로까지 가서 이에야스 사당에 예를 올릴 정도로 도쿠가와 가문은 위대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잖아. 따라서 에도 바쿠후는 조선과의 외교 실무를 맡은 쓰시마에게 통신사를 닛코로 데려가라는 명령을 내린 거지.


대개 외교적 실무를 맡은 담당자 처지에서 보면 나라 사이의 외교 관계에 갈등이 생기는 일을 굳이 하고 싶지 않잖아. 그러면 그 당시 쓰시마는 어땠을까? 나름 외교 술수가 뛰어났던 쓰시마는 그런 쇼군의 명령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아. 도리어 쓰시마는 이번 기회에 능숙한 외교 솜씨를 선보여 바쿠후의 믿음을 확실히 사겠다는 의지가 충만했어. 그러니 이런 기회를 쉽사리 놓치고 싶지 않아. 그래서일까 통신사 삼사는 결국, 닛코로 찾아가게 돼.


국서를 무사히 쇼군에게 전달한 통신사 세 사신은 며칠 뒤 에도를 떠나 닛코까지 가야 했어. 하지만 삼사는 하나같이 닛코 유람을 어리석은 짓이라며 흉을 봤대. 통상 외교적 행사를 거행할 때면 설령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겉으로는 웃으며 좋은 척하는 법이거든. 그런데도 통신사 세 사신의 반응은 왜 그처럼 좋지 않았던 걸까? 아마 모르긴 해도 여러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치? 어떤 이유가 있을까?


첫째, 닛코로 가면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으니, 그걸 무시하고 외면할 수도 없고 반드시 참배해야 할 텐데, 그게 내키지 않았을 수가 있어. 현대사회엔 대부분 외교사절단이 방문국의 국립묘지를 참배해 예를 표하거나 하지만, 왕정 시대에는 대부분 선왕의 무덤이나 사당에 들러 그런 예를 표했거든. 그러니 닛코로 간다는 말은 이에야스 사당에 참배해야 함을 뜻하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지. 그때 통신사로 떠나는 사신들은 대체로 일본을 오랑캐 나라로 여겼으니, 오랑캐 우두머리의 사당에 참배하는 것을 치욕 중의 치욕이라고 여겼을 거야.


둘째, 일본의 말대로 유람이라고 쳐. 하필 그때는 날씨가 몹시 추운 겨울철이었거든. 그러니 주변에 그다지 볼만한 것도 없었을 것 아냐? 날은 춥지, 마음은 내키지 않지, 그런데 발걸음은 옮겨야 하지, 그러니 세 사신으로선 참 재미없는 유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렇지? 유람이라면 따뜻하고 맑은 날에 둘레 자연풍광을 음미하면서 느긋하니 둘러봐야 제맛이 날 거 아냐? 그런데 추운 겨울날 옷깃을 바짝 세우고 걸음만 재촉할 텐데 유람하는 재미라곤 딱히 찾아볼 수 없었을 것 아냐.


셋째, 외교사절단은 대체로 사전에 합의한 대로만 움직여야 하거든. 따라서 조선 조정의 명령도 없는데 세 사신 마음대로 이에야스 사당을 참배했다는 것을 나중에라도 조정에서 알게 되면 조선으로 돌아갔을 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됐을 거야. 조선 시대엔 왕명을 따르지 않으면 반역죄로 처벌받았거든. 그런 형편인데 닛코로 가는 게 무슨 유람이겠어? 어쩌면 귀국 후 처벌이 두려워 세 사신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 닛코에 간 것을 흉본 게 아닌가 싶어.


어쨌거나 통신사의 닛코 유람은 두 나라 사이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다르지? 일본으로서는 밑지는 것 하나 없이 충분한 성과를 올리고 있음에 반해 조선으로서는 손실만 가득한 유람이야. 비록, 그 모든 경비를 일본이 댄다 하더라도 오랑캐로 취급하는 나라의 정부를 연 이에야스의 사당에 참배한다는 것은 조선으로선 무척 수치스러운 일이었거든. 아무튼, 닛코로 통신사가 참배를 떠나는 문제는 1636년 사행뿐만 아니라 이어진 사행에서도 더 이어졌어. 좀 더 살펴볼게.


1643년 사행 때야. 일본은 당시 도쿠가와 이에미쓰(1623~1651)가 3대 쇼군에 올랐는데, 여전히 권력을 안정시키는 게 중요했어.


“나는 아버지인 도쿠가와 히데타다(1605~1623)의 뒤를 이어 20세의 젊은 나이로 3대 쇼군이 되었소! 이제는 지방 다이묘에 대한 통제를 확실히 해서 에도 바쿠후의 위엄을 높이 세우려 하오! 어떻게 하면 내 뜻을 이룰 수 있을지 누가 좋은 생각을 말해 보시오!”

“쇼군 전하! 아무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쪽에 붙었던 서쪽 다이묘부터 없애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들을 그냥 두면 두고두고 불씨가 될 게 빤하니 지금 뿌리를 싹 뽑아야 하옵니다! 그리고 1615년에 만든 ‘무가법 제도’를 21개 조로 바꾸어 지방의 다이묘가 1년씩 교대로 자기 영지와 에도를 오가도록 하면 다이묘가 함부로 반란을 꾀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누구, 또 다른 의견은 없소?”

“쇼군 전하! 에도 바쿠후의 권위를 야무지게 다지기 위해 에도 바쿠후를 연 이에야스 쇼군을 신으로 떠받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교토에 있는 일왕을 움직여 이에야스 쇼군을 ‘동조대권현’이라 칭하도록 함이 어떨런지요? 그런 다음 일왕의 아들이 있는 닛코의 절 도쇼지에서 ‘동조대권현’을 모시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오! 알겠소. 여봐라, 당장 닛코에 할아버지의 사당을 건립하도록 하라!”


이에야스를 모시는 사당을 닛코에 세운 뒤 이에미쓰는 그 후 닛코에 열 번이나 찾아갔대. 이에미쓰의 아버지이자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타다는 아버지의 사당을 네 번 찾아갔어. 사당은 처음부터 닛코에 있었던 아니고 나중에 닛코로 옮긴 거래. 아무튼, 이렇게 이에야스를 신으로 떠받드는 일이 성공하자 에도 바쿠후는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권위를 굳혔으니 이제 통신사마저 닛코로 보내 멋지게 대외적으로도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던 거지.


“쇼군 전하!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했으니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의 묘에 쓸 조선 임금의 친필과 주요 신하의 시, 대장경과 동종, 향로와 촛대, 화병 따위를 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니, 그건 왜요?”

“어차피 닛코 사당에 죄다 필요한 것들인데, 우리가 다 만들어 배치하는 것보다는 이왕에 조선의 왕이 보낸 글씨까지 곁들인다면 우리 일본의 존엄과 쇼군의 위대함을 더더욱 돋보이게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오호라, 좋소. 그리 합시다!”


일본의 이런 요청에 따라 조선은 북쪽에서 새로 일어난 청나라를 견제하고, 남쪽 일본의 사정을 엿보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게 됐어. 게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닛코까지 가서 이에야스의 사당에 제사까지 지내 주었지. 그러니 일본의 에도 바쿠후 체제를 안정시키는데 통신사가 크게 이바지한 셈이야. 아, 지금 닛코에 있는 조선왕의 친필로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야. 왜냐고? 그때 조선에서 보낸 것은 왕의 친필이 아니라 왕의 종친이 쓴 글씨를 보냈거든.


하여튼, 말 많은 통신사의 닛코 유람을 마지막으로 다녀온 때는 1655년이야. 그때도 일본에서는 이에미쓰의 무덤이 있는 대유원에 쓰겠다며 등롱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 그래서 제수를 준비하는 요리사인 숙수까지 딸려 보냈대. 그러니 1655년 사행 때는 국서전달 다음으로 큰 외교행사가 바로 닛코 참배였어. 결국, 조선에서도 닛코 참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지. 그래서일까 1655년에 닛코로 참배를 떠났던 종사관 남용익은 오랜 피로와 외교적 긴장으로 잠 못 드는 밤이 많았음에도 닛코 산세의 수려함에 감탄하면서 『부상록』에 이렇게 남겼어.


“산의 생김새를 말하자면 웅장하다. 높기는 후지산보다 못하나, 봉우리가 빼어난 것은 멋진 경치다. 원씨 양세가 여기에 사당 터를 정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도다.”


여기서 원씨는 도쿠가와 집안을 말하는 것이니 곧 쇼군 집안을 일컫는 말이야. 어때? 통신사가 닛코를 오가면서 겪은 일들을 살펴본 소감이? 세상사란 이런 법이야. 지난 1636년 사행을 떠난 통신사 사신은 에도 바쿠후의 권유로 닛코를 처음 둘러봤을 때 닛코의 산세와 사당터를 욕하기 바빴잖아? 그런데 청나라가 들어서고 일본과의 관계가 새삼 중요해져서 닛코 참배를 공식 일정으로 확정 짓자 사신의 평가는 달라지기 시작해. 그러니 통신사의 닛코 참배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서로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서로 보탬이 되려고 애쓴 흔적도 흠뻑 묻어나. 아, 통신사의 닛코행은 앞서 본 1636년 사행, 1643년 사행, 1655년 사행이 전부야. 왜냐하면, 그 뒤로 일본 에도 바쿠후는 권력을 확실히 안정시켰으니 무리해서 경비를 써가며 통신사를 닛코까지 보낼 이유가 없었거든. 역사 속 요지경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 맞지?


생각거리)


통신사가 닛코로 참배를 떠난 것에서 보듯 어찌 보면 이 세상의 일 가운데 상당 부분은 명분과 실리 싸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세상의 변화를 재빨리 읽어서 그걸 반영하는 거지요. 오늘날의 사회는 워낙 눈부시게 발전하는 데다 그 변화의 속도도 무척 빨라서 조금만 방심하면 뒤처지는 세상이 돼 버렸어요. 이처럼 사회가 급변하는 현실에 잘 적응하려면 평소 어떤 버릇을 들이는 게 좋을까요? 솔직히 말이 쉽지,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는다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죠? 변하는 현실에 맞춰 실리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아니면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명분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아니면 실리와 명분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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