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스스로가 모든 것을 잘하는 아이인 줄 알았다. 국어나 수학에도 두각을 보였고, 음악이나 미술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해내는 편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체육 시간에 내가 몸을 쓰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이 가벼운 1학년생들이 평범하게 해내던 구름사다리에서 나는 단 한 칸도 이동할 수 없었고, 철봉이나 정글짐에서도 번번이 떨어졌던 것이다.
'아... 나는 운동에는 영 재능이 없구나.'
그때부터 차곡차곡 쌓인 슬픈 기억을 꺼내자면 한 두 개가 아니다. 남들은 쌩쌩이 줄넘기나 엑스자 줄넘기를 하는 동안 나는 기본 줄넘기 줄에도 끊임없이 걸려 넘어졌다. 온 동네에 체육 실력이 탄로나는운동회가 싫었고, 달리기에서 손등 도장을 받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잉크 자국이라도 문지르곤 했다.
학년이 올라가니 수행평가라는 것이 생겨서체육 시간이 더욱 싫어졌다. 티볼 (야구와 유사한데 기둥 위에 올려져 있는 공을 친 후 3루를 돌아오는 종목) 수행평가에서 나는 세 번의 헛스윙으로 아웃을 당했다.가만히 놓여 있는 공을 못 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팀 친구들이 화를냈는데, 나름대로 방과 후에 열심히 연습한 결과가 그것인 터라 억울했다. 배드민턴 수행평가에서도 핑퐁 0회, 농구 수행평가에서도 레이업 슛 0회가 노력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체력장에서 멀리뛰기를 할 때였다. 거의 제자리에서만 뛰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선생님이 앞에 있는 똥 웅덩이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연극 분야에는 능했기 때문에 똥을 피하는 상황에 몰입해서 온 힘을 다해 뛰었는데, 똥 웅덩이를 피하자마자 균형을 잃고 뒤로 굴러서 시작점보다 마이너스의 기록을 내고 말았다. 체력장 점수는 고사하고 사실상 온몸에 똥을 묻힌 꼴이니 그 후로 체육 시간에 괜한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운동과 거리가 멀어진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 생겼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폴댄스는 내가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은 유일한 운동이다.
폴댄스 학원에 등록하면, 가능한 맨살이 많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오라고 한다. 허벅지, 배, 겨드랑이 등 맨살과 폴이 맞닿는 마찰력을 이용해서 매달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 수업부터 어려운 동작을 시도하진 않으므로 부끄러우면 반팔, 반바지를 입고 와도 된다고 안내를 받는다. 하지만 나는 첫날부터 요가복과 수영복을 총 동원한 복장으로 맨살을 잔뜩 드러냈다.
필라테스나 크로스핏을 어설프게 익히는 동안 확실하게 배운 것이 한 가지 있으니 권장하는 복장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괜히 딱 달라붙는 상의와 레깅스를 입는 것이 아니었다. 펑퍼짐한 박스티와 헐렁한 추리닝 바지를 입으면 등이 굽거나 무릎이 틀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없으니, 초보일수록 어딘가 잘못된 자세로 용을 쓰게 된다. 비슷한 맥락으로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는 폴댄스를제대로 배우지 못할까 봐 민망함을 무릅썼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첫 수업부터 이런저런 동작들을 시도하게 되었다. 두 손으로 폴을 잡고 매달릴 수 있는지 테스트해본 후에, 오금 끼우기, 겨드랑이 끼우기로 확장했는데 의외로 버틸 만했다. 가능성이 보였는지 내친김에 양 무릎 사이에 폴을 끼우는 클라임부터 완성 동작까지 연결해 보자고 하셨다. 사실 연결이라고 해봤자 20초 가량의 짧은 시간이지만, 보통은 난생처음 폴을 잡아보는 사람에게 시키지 않는단다. 나에게서 재능이 보여 첫날부터 시켜본다는 말에 나도 의욕이 샘솟았다.
내가, 운동에 재능이라니.
당연히 단숨에 되지 않아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별 것 아닌 동작인데 손바닥,오금,무릎할 것 없이 온몸이 너무 아팠고, 말 그대로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목표치가 분명하게 보이니 의지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다시 시도할 때마다 완성 동작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도 재미있었다.
진짜 희열은 어떻게든 그날의 목표 동작을 만들어냈을 때 찾아온다.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엉성하고 시시한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시한 동작을 성공시키기까지 고군분투한 시간을 아는 나는, 그 순간 온 세상이 반짝거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콩주머니를 던지다 보면 거대한 박이 펑 터지며 색종이가 흩날리는 순간의 기쁨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온몸에 멍이 들고 삭신이 쑤시더라도 이 재능이 제대로 빛날 때까지 갈고닦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