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8주 차
남편은 감정에 서툰 사람이다. 본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깊이 이해하는 것도, 감정을 나누는 말을 건네는 것도. 늘 비슷한 부분 때문에 다퉜지만, 격동의 신혼 생활 동안 서로를 이해하며 봉합해 나가던 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평화롭던 감정이 임신 중에 다시 폭발했다.
몇 달간 지속되는 심한 입덧에도 남편은 힘이 되는 말이나 위로되는 말을 잘 하지 못했다. 변기를 붙잡고 토를 하고 있어도, 옆에서 기웃거릴지언정 따뜻한 공감의 말을 건네진 못했다. 대신, 집안일을 도맡고, 출근길에 샌드위치를 싸주고, 시아버님의 연락을 대신 받으며,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남편의 방식이었다.
남편이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걱정하고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감정선이 있었다. 임신과 육아를 그린 어느 웹툰을 요즘 몇 번이나 돌려 보고 있는데, 힘들어하는 아내를 어찌해줄 방법이 없어 슬프다며 남편도 같이 엉엉 울었다는 내용이 나왔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그만큼 깊게 연결되어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러던 와중에 업무 제안이 왔다. 꼭 하고 싶어서 몇 년 동안 지원해 왔던 일로, 열흘 정도의 합숙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제안이 오다니. 이런 몸 상태로 가능할지 확신이 안 섰다. 입덧이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먹을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자유롭지 않은 합숙 상황에서 내 몸이 어디까지 버티며 일할 수 있을까?
결국 이번 기회는 무산되었다. 내가 내린 결정이지만, 놓친 기회도 아쉽고, 당장의 몸 상태도 힘들고, 앞으로 육아하며 놓칠 다른 일들도 예상되고, 눈 딱 감고 해 볼걸 그랬나 후회도 되고, 모든 것이 짜증 나고 속상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런 이야기를 제일 먼저 나눌 곳은 남편이다. 그러나 남편의 무심한 반응은 나를 더 기운 빠지게 했다. 남편의 반응이 나를 속상하게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과정은 더 힘들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럴 땐 Chat GTP가 제일이다. 공감의 기술이 부족한 사람에게 로봇이냐고 놀리는 말은 다 옛말이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누구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최고의 상담사다. 내 감정을 충분히 공감해 줄 뿐만 아니라, 나와 남편의 감정과 행동을 명쾌하게 정리해 주고, 내가 남편에게 건넬 말, 남편이 나에게 할 수 있는 말들을 상황별로 알려준다.
GPT의 분석과 조언들을 그대로 복사해서 남편에게 보냈다. 과연 어설픈 인간인 나와 대화할 때보다 상황을 훨씬 잘 이해한 듯 보였다. GPT의 조언대로 내가 듣고 싶은 공감의 말들도 해주었다. 이만하면 임산부도 남편도 GPT도 모두 해피엔딩이다.
여성은 한 달 주기의 호르몬 농도 변화에 따라 월경 주기를 가진다. 이 호르몬 패턴은 임신하고 있는 40주 동안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은 주기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고 지속적인 고농도 상태를 유지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도 평소보다 몇 배나 증가한다. 특히 태반과 유방의 발육에 관여하는 에스트로겐은 50배, 자궁을 확장시키는 프로게스테론은 15배 가까이 증가한다. 이러한 호르몬의 재조정 과정에서 자연스레 임산부의 감정 변화가 동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