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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Jun 18. 2020

프롤로그: 우리 함께 잠들었던 날들


#1. 우리 함께 잠들었던 날들




Y,


어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대화를 하다 스르르 잠에 들었지.

함께 잠드는 일이 이토록 아름다운 일인지, 당신을 만나기 전엔 미처 몰랐어.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날, 이러다 자정을 넘기겠어, 하는 마음에 

초조해져서 눈이 더 말똥말똥해지는 밤.

잠들기 직전인 당신을 불러서, 지루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라.

피곤하다고, 지루한 이야기 같은 거 모른다고 귀찮아할 법도 한데,

잠시 잠을 떨쳐내고 나를 꼭 껴안으며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자장가 같은 이야기를 시작해.

이를테면, 군대 이야기 말이야.


다른 남자들이 하는 군대 이야기는 지루하기만 한데

당신의 군대 이야기는 지루하면서도 재미있는 데가 있어. 

당신 이야기의 레퍼토리 중 하나가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잖아.

달리기가 느려서 골키퍼를 맡았는데,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못 막아서 실책 한 이야기는

왜 들어도 들어도 웃기는지 모르겠어.

슬로우 모션처럼 다리 사이로 지나가는 축구공을 바라만 보던 당신이 눈에 선해.


농구는 좀 잘해서 뽐내보려다가, 다리를 삐끗해서 인대가 늘어나는 바람에

2주 동안 누워서 아무것도 못한 얘기도 매번 재미있어. 

그때 당신은 이병이었다며. 선임들 수발 들 시기에 누워 있으니 눈치가 보였다고 했지.

일일 시트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에 깔깔대고 웃다가, 

당신이  턱걸이를 몇 개나 했는지 아령은 몇 키로까지 들었는지 

내무반에서 두번째로 힘이 셌다는 걸 자랑할 때쯤 미친 듯이 잠이 쏟아지곤 해.


역시 사람은 남의 허물 듣기는 재미있어하지만, 자랑은 듣기 싫은가 봐.


어쨌든 덕분에 어제도 나는 꿀잠을 잤어.

당신이 새벽에 출근하는 기척도 듣지 못했네.

당신을 만나기 전 나는 혼자, 언제 어디서도 잘 자는 사람이었는데

8년을 당신과 같은 침대에서 자다 보니 곁에 없으면 허전해서 깊은 잠을 잘 못 자.

혼자 여행하면서 공항에서 노숙도 하고, 낯선 숙소에서의 첫날밤도 잠 한번 설치지 않고 자던 나였는데

이제는 당신의 통통하고 두꺼운 몸을 한번 끌어안은 다음에야 푹 잘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


나를 좀 재워달라고 피곤한 당신을 귀찮게 해도

짜증 한번 내지 않는 그 다정함이 오늘도 나를 깊은 잠에 들게 해.

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랑을 길어 올려 내게 쏟아붓는 건지, 궁금해질 때가 있어.

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먼저 잠든 당신 옆으로 가서 누울 때,

나는 당신에게 시험하듯 묻곤 해. 나를 좋아하냐고. 자는 와중에도 당신은 '응'이라고 대답한다니까.


지금부터 쓰려는 이야기는 당신에 관한 이야기야.


나는 당신처럼 말 한마디 예쁘게 건네고 부드럽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 서툴지만

글로 마음을 전하는 데는 소질이 있거든.


혹시라도 내가 옆에 없는 날에,

허전해서 잠이 오지 않는 날에,

이 이야기를 읽어주길 바라.


우리 함께 잠들었던 날들,

함께 잠들 날들,

그 아름다운 밤의 순간을 기억해주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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