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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29. 2020

예쁘게 말하기


 캠핑을 가기로 했는데 Y가 몸살기운이 있다고 해서 여행을 2주 후로 미뤘다. Y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코감기와 목감기를 앓는다. 한번 감기에 걸리면 한 달이 넘게 앓는 걸 알아서 이제는 증상이 가벼울 때 약도 먹이고 가습기도 틀어주고 뜨거운 차도 끓여준다. 내가 누군가를 보살펴주는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대상이 동식물이든, 사람이든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 성숙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혼자다’라는 말은 얼마나 경솔하게 하고 살았는지. 혼자 잘나서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단 한 가지도 없었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할 뿐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매순간 다른 존재의 조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혼자일 때도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건강 체질이라고 자부하면서 살던 Y는 삼십 대 후반이 되면서 체력이 많이 무너졌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이 많다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쇠약해져 가는 몸을 이고지고 사는 일이 아닌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도 든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영양제를 잘 챙겨 먹어야지. 요즘 그가 일하는 카페는 손님들로 미어터진다 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사람들이 갈 곳이 없으니 다 카페로 오는 것 같다고. 새벽 6시에 시작해 오후 3시까지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하니 여태까지 병이 나지 않은 것이 사실 이상한 일이다. 영주권이 나오면 바로 그 날, 카페를 그만둘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노예 해방의 날이 되겠지.      



 어제에 비해 컨디션이 한결 나아진 Y는 밖에 나가 배드민턴을 치자고 했다. 한낮의 공원에는 개들과 개들의 주인이 서로 어울려 놀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배드민턴공이 엄한곳을 향해 날아갔다. 검은 개가 달려오더니 공을 가지고 달아났다. 그 개를 쫓느라 푸른 잔디밭을 달리는데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개들이 목줄만 풀어주면 기를 쓰고 달리는 구나. 시원한 바람에 눈이 번쩍 떠졌다. 나와 놀고 싶은지 개는 일부러 공을 내어주지 않았다. ‘얘, 그거 내꺼다.’ 내가 말하자 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침 발랐으니 이제 내꺼’ 라고 항의하는 듯도 했다. 다행히 개 주인이 공을 되찾아 주었다. 바람이 잦아 든 틈을 타서 다시 공을 쳤다. 꼬마 아이가 다가와서 공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나인..... ‘텐’에서 바람이 세게 불어 공을 놓치고 말았다. 우리보다 아이가 더 아쉬워했다. 



 Y가 공원이나 한 바퀴 걷고 집에 가자고 했다. 걸으면서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 퍼스에 코로나 확진자가 500명이 넘고 모든 카페와 레스토랑이 문을 닫았던 4월의 이야기를 했다. 소처럼 쉬지 않고 일한 Y의 유급 휴가가 한 달 넘게 쌓여 있던 상태여서 쉬는 동안에도 월급이 나왔다. 영주권이 나오면 쓰려고 차곡차곡 모아뒀던 것인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반강제로 소중한 휴가를 써 버리다니. 당신 불쌍하다. 일복이 많은가 보다. 내가 말했다. 



 카페가 문을 닫아 일을 쉬게 된 5주 동안 Y는 매일 공원에 나가 10,000보를 걸었다. 저녁에는 백팔 배를 했다. 

유튜브에서 영어공부 콘텐츠를 하나씩 봤다. 내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을 연료로 발전하고 성장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건강한 사유와 실천으로 마음의 면역체계를 단단히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무기력’이라는 단어는 그와 상관없는 단어처럼 보였다. 어쩌다 이 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을까, 가끔 호기심에 휩싸이는데 돌이켜보면 밝고 침착한 기운에 이끌렸던 것 같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단순히 자기애에서 끝나지 않고 부지런함으로 이어지는 모습에 반했었다. ‘내 삶의 동력은 너야’ 라고 말하는 엄청난 말빨도 결혼을 결심하는 데 한 몫 했었지. 오늘도 그 말을 했다. 내가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힘은 너야.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예쁜 말들이 내 마음을 보살펴 왔다. 아름다운 말들이 있어서 인생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배웠다.      



 집으로 돌아와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화이트 와인도 한 잔 곁들여 마셨다. 너와 이렇게 밥 먹을 때가 제일 좋아. 그가 하는 말들에 익숙해져서 고마움을 모르게 될까봐, 시큰둥해 하는 사람이 될까봐, 매번 웃으며 답한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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