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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Jun 24. 2020

남들이 보기에 촌스럽고 지루해 보여도



Y,


지난 이틀, 하루 종일 당신과 붙어있으면서 글이 될 말들을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는데 

바람이 모래알을 쓸어가듯 다 날아가버렸어.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못한 말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오늘은 우리가 같이 백팔배를 한 지 팔십오일째 되는 날이야. 

웃기지. 사귄 지 100일 되었는지, 1000일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는데

올해는 결혼기념일까지 깜빡 잊고 지나갔는데 

백팔배를 같이 한 날짜를 세고 있다니.



30대인 우리가 가끔 70대 노부부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나가는 모임도 없고 둘 다 친구도 없어서 

시간 있으면 둘이 손잡고 공원 걷고 커피를 마시는 게 다잖아. 



우리는 매일 같은 외출복을 입고 침대 없이 바닥에 누워서 자.

소형차를 타고 집은 없고, 주식투자나 부동산에도 무지하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내가 걱정하면 당신은 '나는 너만 있으면 돼' 하며 웃어.  

'나는 당신 말고도 필요한 게 많은 사람이야' 하고 대답해도 들은 척 만 척, 활짝 웃잖아. 

당신이 웃으면 나도 웃게 돼. 



매일 저녁 5시 반, 우리는 나란히 서서 노스님의 백팔배 참회문을 틀어놓고

목탁소리에 맞춰서 한 배, 한 배, 정성스럽게 절을 해. 

분명 여름에 시작해서 땀을 뻘뻘 흘렸던 것 같은데 그 사이 겨울이 되었어.

당신과 또 한 계절을 보냈구나, 요즘엔 그 생각을 자주 해.

다시는 오지 않을 여름과 언젠가 사무치게 그리워할 가을을 지나왔다고. 

다음 계절에 당신이 없다면 혹은 내가 없다면, 

홀로 남은 사람은 남아있는 계절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백팔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당신보다 딱 하루만 더, 아니면 하루만 덜 살고 싶어.  

 


지난달에 우리는 노란 포스트잇에 소원을 적어서 불상 앞에 올려두었지.

옆에서 절을 하는 당신의 얼굴이 너무 간절해서 종종 웃음이 터져. 

자식들 잘 되라고 손발 닳도록 비는 노보살님들의 얼굴이 꼭 그렇거든. 

남산만 한 배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표정을 하는데 어떻게 안 웃을 수 있어. 


당신은 '간절함'만큼 인생에서 강한 무기가 없다고 했지.

살면서 좀처럼 간절한 마음 가져본 적 없는 나는 

아무것도 빌지 않는 대신 당신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빌곤 해. 

당신의 간절함에 숟가락 하나 얹는 거야. 똑똑하지?



백팔배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었을 때 당신의 대답은 좀 의외였어. 

이 시간이 아니면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어서,라고 진지하게 말했잖아. 

혼자 속으로 조용히 웃었어. 내 20대 시절이 생각났거든. 

매일 백팔배를 하면서, 일기장에 이런 말을 적던 시절이었어. 



'누군가 나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하면 나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고 싶다. 

예전에는 그 목적이 외로운 마음에 의지하고 싶어서였다면 지금은 서로를 성장시켜 줄 평생의 소중한 친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좀 다르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인생이 한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인과응보라는 걸 아는 사람, 욕심 없고 따듯한 사람, 쉽게 화내지 않는 사람. 그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볼 일이다. '  -    [2009년 3월 일기]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서로를 성장시켜 줄 평생의 소중한 친구를 만난 것 같아. 

당신은 지혜롭고 따듯하고 쉽게 화내지 않지. 

소원이란 그렇게, 이뤄진 줄도 모르게 이뤄지나 봐. 

당신이 간절하게 비는 그 소원도 곧 이뤄질 거야. 

그러니까 오늘도 우리 같이 손을 모으고 백팔배를 하자. 

남들이 보기에 촌스럽고 지루해 보여도, 온 마음 다해 서로를 향해 절을 하자.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오래오래 공경하고 존경하는 그런 사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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