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선생님 눈치를 보며 친구들과 몰래 주고 받던 기억이 난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붙어 있으면서 무슨 할 말이 그렇게 서로 많은지 노트 맨 뒷장이나 교과서 모서리를 찢어 친구에게 건네던 때. 쉬는 시간에 매점 가자.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가자. 수업 아직도 30분이나 남았어. 국어 (선생님), 오늘따라 잘생겨 보여. 시시콜콜한 일들이 인생의 중대사였던 사춘기 시절이었다.
시험만 없으면 천국이 펼쳐질 거라고 믿었던 때기도 했다. 시험 없는 세상에 막상 살고보니, 인생 자체가 시험기간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내가 쓴 답이 오답인지 정답인지, 몇 점을 받았는지, 몇 등인지 알려주지 않는 어렵고도 막막한 시험. 시시때때로 시험에 들면서 바로 결과가 나오는 문제를 풀던 10대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시험 기간이 되면 꼼꼼하게 필기 잘하는 친구들의 노트를 베껴쓰기에 바빴다. 이번 만은 반 꼴등을 면하리라 심기 일전한 담임 선생님이 아예 필기왕 친구의 노트를 복사해서 배포한 적도 있었다. 노트 정리를 잘 하는 애들은 뭘 해도 야무지게 잘했고 글씨체도 예뻤다. 당시 우리반에서 글씨를 가장 잘 쓰는 K의 서체를 따라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악필은 아니었는데도 나의 노트는 어쩐지 산만하고 지저분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노트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냐고 묻자 K가 답했다.
"있잖아. 나도 처음엔 잘 못 썼어. 그냥 잘 써야겠다고 의식하면서 쓰니까 어느 순간 글씨체가 변하더라고. 너도 연습해봐. 잘 쓸 수 있어"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세상에는 연습해도 안 되는 게 많다고 믿었던, 포기가 빨랐던 열 네살 시절이었다. 노력만으로 잘생긴 외모나 높은 아이큐를 얻을 수 없는 것처럼 글씨체도 그렇다고 믿었다. 천재는 악필이래. 누군가 말했다. 글씨 잘 써서 뭐하냐, 잘 쓰는 사람 글씨를 복사하면 되지.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애나 어른이나 연습이 싫어서 핑계를 갖다붙이는 데는 선수였다.
독서노트를 쓰는 동안 종종 K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연습해 봐. 잘할 수 있어. 나도 그랬어. 몰스킨 노트의 첫 장을 쓰던 날. 그날도 하루종일 일 하느라 피로에 쩐 남편은 먼저 잠이 들었고, 나는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켜 놓고 한 줄 한 줄, 문장 필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손으로 글씨를 써보는지라 열 줄 정도 쓰고나니 몸이 다 쑤셨다. 내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팔과 손목에 짜증이 났다.
헤이, 손목.
오늘은 나의 본격적인 필사 첫 날이라고. 두 페이지는 써 줘야 하지 않겠어. 벌써 지치면 곤란해.
그러나 손목은 파업을 선언한 노동조합원처럼 단호했다. 물 한잔 마시고 쓰고, 화장실 한번 다녀왔다 쓰고, 잠시 누워서 쉬다 일어나 썼다. 나를 달래가면서 산만한 필사를 한 지 한달 쯤 지났을까. 그제서야 '필압'이란 걸 조금씩 인식하기 됐다. 펜을 쥔 손가락에만 힘을 조금 덜어내도 조금 더 오래 필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욕심내서 더 많은 분량을 필사하고 싶어도 몸이 원하지 않으면 그만두는 법도 배우게 됐다. 나의 컨디션을 파악하고 페이스를 조절해야 한다는 점에서 필사는 장거리 달리기와도 비슷했다. 탄력을 받아서 한 두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노트를 작성하다보면 그날은 어김없이 두통과 근육통이 찾아왔다. 최대한 힘을 빼는 법, 내 능력치를 알고 할 수 있는만큼만 하는 것, 독서노트가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적용되는 얘기였다.
당연하지만 당연하게 알아차리지 못한 깨달음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무렵, 글씨체가 변하기 시작했고 그 변화를 목격하는 기분은 굉장히 묘했다. '어? 뭐지?' 하는 변화의 감각은 물리적인 이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생생했다. 비슷한 기분을 백팔 배, 삼천 배를 하면서 느낀 적이 있었다. '변하기 전의 나'와 '변한 후의 나' 사이의 경계점에 서 있는 느낌. 변화보다는 변신에 가까운 상서로운 감각. 변화란 나도 모르는 사이 가랑비에 옷 젖듯 이뤄지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인식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매일 온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거였다. 변화가 미세할 때는 알아차리기 힘들겠지만, 경사가 큰 변곡점을 지날 경우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매일 스스로에 대해 촉수를 세우고 예민하게 깨어만 있다면. 그러니까 필사라는 행위가 나를 매일 깨어있게 만들어준 거였다.
내 글씨체는 2019년 1월 첫째주 무렵, 소설가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이라는 책의 문장을 필사하는 동안 바뀌었다. 누군가 내 노트를 확인한다면 '응? 똑같은데?' 하는 반응을 보일 만큼 육안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나만은 묘하게 달라진 서체을 알아볼 수 있다. 당시 필사를 할 때의 감각도 내 손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만 같다.
연습해 봐. 너도 잘 쓸 수 있어.
20여년이 지나서야 K가 다정하게 강조했던 '연습'의 의미를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일이 있어도 '그까짓거 해서 뭐해' '안해도 잘 먹고 잘살아' 자조하고 포기하고 때로 타인의 성실함을 비아냥대던 내가, 조용히 천천히 재량껏 연습을 해서 목표에 다가가려는 사람이 됐다. 이후로 나는 '연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됐다. 거창하지 않아서 겸손하게 들렸다. 수련이나 단련이라는 말과 달리 부담없이 가볍고 담백하게 들렸다. 무엇보다 K가 해준 말이라서 좋았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찍이 '연습의 힘'을 깨달았던 순수한 소녀가 내 무의식 저편에 선물처럼 깊게 남겨준 말이어서.
열 네살의 나처럼,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믿지 않고 자조와 포기에 익숙해진 누군가에게 K의 말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연습해 보세요. 잘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잘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연습은 재미있거든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