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밑줄을 긋는 이유

by 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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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심정이 어떤지 안다는 사람은 다 바보다”
청소부 매뉴얼 / 루시아벌린


2020년 1월 10일, 잠자리에 들기 전 엎드린 채로 이 문장을 독서노트에 꾹꾹 눌러 적었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다른 사람의 심정이 어떤지 안다는 사람은 다 바보다.” 육성으로 읽고 나니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타인을 이해하는 척, 공감하는 척 연기했던 순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나만 생각하며 사는 것 같다고, 누군가를 위해 마음 아파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은 잠시 뿐이고 내 안위와 미래만 걱정하면서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은유 작가는 <쓰기의 말들>이라는 책에서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태도’라고 구분했다.


독서를 하면서 연민이 아닌 공감의 태도를 배우지만 실은 허울뿐인 지식이라는 걸 안다. 나는 내 삶을 던지면서까지 누군가의 고통에 함께 할 자신이 없다. 내 고통을 같이 짊어줄 사람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왜 이렇게 사람이 팍팍해졌을까.


<청소부 매뉴얼>을 쓴 루시아 벌린 작가는 1936년 알래스카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광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서부지역과 멕시코 국경지역을 돌아다니며 하층 노동자의 삶을 가까이서 경험했다. 미국 버클리와 오클랜드에서 교사, 전화 교환수 , 병원 사무직, 간호보조, 청소 등의 육체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고,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으면서 네 아들을 혼자 키웠다. 가난과 실업 , 낙태와 알코올 중독을 겪으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생계형 글쓰기 노동자였기 때문에 주로 짧은 단편소설을 썼는데, 의도가 어찌 됐든 그녀의 소설은 짧아서 더 강렬했다. 반짝이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생을 맹렬하고도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이 고통스러울수록 글은 빛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 고통을 이야기하는 화자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불행과 슬픔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제대로 겪어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책을 읽고 얼마 후 우연히 <배심원들>이라는 국내 영화를 봤다. 국내 최초로 배심원 제도가 도입되던 날의 해프닝을 그린 영환데 무겁지 않으면서도 전하는 메시지가 묵직했다.


영화 속 피고인의 죄목은 친족 살해였다. 어린 시절 화재 사고로 얼굴에 심한 상황을 입고 손가락 네 개를 잃은 피고인이 생활고를 겪다 어머니를 죽이고 생계지원금을 가로챘다는 혐의였다. 문제는 피고인이 어머니가 사망한 시점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이 난감한 판결이 법에 무지한 시민 배심원들에게 달려있는 상황이었다. 여론을 신경 쓰며 신속하게 유죄 판결을 내리려는 재판부와 달리, 배심원들은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문제의 엄중함을 직시하며 수사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한다. 그러던 중 초기 수사의 허점을 발견하고 현장검증을 요청해 사건 현장인 피고의 임대 아파트를 방문하게 된다.


그때 배심원 중 한 명은 낡고 허름한 피고인의 방에서 <세계 명언 365일>이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옆에는 이런 메모가 적혀있었다.


‘최선을 다하면 기적은 일어난다. 헬렌 켈러’


의수를 끼고 펜으로 삐뚤빼뚤 기적을 써 내려간 사람이 과연 어머니를 살해했을까. 배심원은 조심스럽게 의문을 갖는다. (물론 비이성적인 추리이지만.. 영화지 않은가) 영화를 보면서 나도 헬렌 켈러의 말을 필사하는 피고인의 마음을 상상해보게 됐다. 낭떠러지 같은 삶의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희망의 말을 적어보는 일. 한밤중, 망망대해에 혼자 표류되어 바다로 확 뛰어들어버릴까 싶었는데 달이 밝고 아름다워서 어떻게든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헬렌 켈러의 말이 피고인에게 달과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까. 그가 베껴적은 <세계 명언 365>라는 책의 표지가 누렇게 바래 있는 걸 보고 눈물이 났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수천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책 속에 들어있는 단 하나의 구절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수십 권, 수백 권의 책을 읽으면서도 인생의 단단한 기둥이 될 단 한 문장을 발견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삶을 사는 사람에게만 책 속 문장이 축복처럼 내리는 게 아닌가 싶다. 언젠가 그런 문장을 발견하고 싶고, 그런 문장을 쓰고 싶다.


책을 읽으며 오늘도 수십 개의 밑줄을 그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그 문장들이 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일은 조금 더 알게 되면 좋겠다. 다만 지금은 함부로 아는 체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심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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