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독서노트에 빠지면서 나는 처음으로 '다꾸'라는 신조어를 알게 됐다. 소셜 미디어에서 만나는 '다꾸러'들은 자신이 기록하고자 하는 내용과 용도와 어울리게 직접 레이아웃을 그리고 스티커나 사진을 오려 붙였으며 다양한 종류의 펜을 활용해 글씨를 쓰고, 화려한 그림도 그려 넣었다. '다꾸의 세계'를 접하면서 나는 학교 앞 작은 문방구에만 가도 눈이 홱홱 돌아갈 정도로 많은 필기구를 구경할 수 있는 K-문구 시장의 위대함을 느꼈다. 내가 사는 서호주에서 가장 갈 만한 문구점은 대형 사무용품점인 '오피스 워크(Office work)라는 곳이 대표적인데 그곳의 '다꾸 용품'들은 허섭스러웠다.
그러다 우연히 대형 마트의 매거진 코너에서 'Frakie'라는 이름의 호주 디자인 잡지를 발견했다. 기사 내용도 좋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잡지에 실린 일러스트나 사진이 너무 내 취향이었다. 오려서 벽에 붙여놓으면 인테리어 효과로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마스킹 테이프를 구입하는 대신, 잡지의 가장자리를 마스킹 테이프 모양으로 오려 붙였고, 요즘 유행하는 동그라미 스티커를 구하고 싶지만 구하지 못해, 동그라미를 직접 오려 풀로 붙였다. 세모와 네모도 오려 붙였고 책과 관련된 일러스트는 언제든 활용하기 위해 미리 잘라 두기도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이것은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터득한 내 전반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보통 그 달에 읽은 책을 노트 한 페이지에 정리할 때 '다꾸'를 활용했는데 가위와 풀을 이용해 노트를 채워가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쉼 없이 손을 움직이면서 한 가지에 깊게 몰입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에 흰 도화지 앞에서 막막해하던 나였는데 예쁘게 꾸며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으니, 노트의 공백이 마치 놀이터처럼 느껴졌다. 독서노트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첫 달에는 총 21권의 책을 읽었고 각각의 책 제목과 작가 이름, 작품의 별점을 표로 정리했다. 그 달의 독서에 관한 코멘트도 간략히 적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장르소설에 관심이 생겨서 추리소설을 읽었다. 제일 재밌었던 추리 소설은 <마당 있는 집 / 김진영>. 나는 한국 소설을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일본 추리 소설은 잘 안 맞는 것 같고) 다음 달에는 인문학 책을 더 읽고 싶다. 21권의 책을 읽었다니 뿌듯!"
시시콜콜한 기록인데 2년이 지난 지금 보니 묘하게 웃기다. 21권의 책을 읽고 뿌듯해하는 나라니. 독서노트를 쓰고 싶은 마음에 무리해서 읽기는 했지만 나의 책 읽는 속도로 한 달에 21권은 무리였다. 몇 권을 읽는지보다 몇 페이지를 읽는지 기록해두면 어떨까 싶어 10월은 페이지 수도 같이 적었다. 계산해 보니 14권의 책, 총 5151 페이지를 읽었다. 열정이 과해서 다독에 목맬 때였다. 지금은 한 권의 책을 시간 들여 읽는 쪽을 선호한다. 시간을 들이나 안 들이나 금방 내용을 잊어버리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아무래도 아날로그 방식의 기록이다 보니 인덱스를 따로 해두지 않으면 내용을 찾기 위해 한참 헤매야 하는데, 달별로 읽은 독서 목록을 보기 좋게 한 페이지에 정리하니 보기에 편했다. 독서에 대한 나의 열정과 애정을 요약한 것 같아 그 페이지를 보면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혼자서 식탁에 앉아 잡지 사진을 오리고, 삐뚤빼뚤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 대용품을 직접 만드는 그때의 모습을 상상하면 왠지 모르게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여겨진다. 나에게도 아직 때 묻지 않은 구석이 1.2% 정도는 남아있구나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