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기록 3년 차, 이제는 안다.
내가 노트 한 권을 다 쓰지 못한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노트의 용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해서였다는 것을.
얼마 전 새 독서노트를 구입했다.
문구류 중에서도 노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한 권의 노트를 빽빽하게 다 쓰고 난 뒤의 뿌듯함, 새 노트를 손에 쥐었을 때의 설렘, 새 노트의 비닐 포장지를 벗기는 기록 덕후의 쾌감이 얼마나 짜릿한지 말이다.
빳빳한 첫 페이지에 첫 문장을 쓰는 순간의 떨림은 마치 첫 키스..... 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행여나 틀릴 세라, 잉크가 번질세라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고도로 집중한다. 조금이라도 삐끗해서 첫 장을 망치게 되면 좋아하는 사람과 첫 데이트를 망쳐버린 사람처럼 울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추사' 대신 '추한(ugly)'이라는 호가 붙겠지만 그 정도로 첫 페이지는 소중하단 얘기다.
물론 서 너장 쓰고 나면 초심은 사라지고 없다. 글자를 틀리게 써도 굵은 펜으로 밑줄을 죽죽 그으면 그만이다. 그럴진대, 왜 유독 첫 페이지에 공을 들이는 건지는 나도 모른다. 스마트폰 산 첫날, 애지중지 다루는 것과 비슷한 심리가 아닐까 한다.
나의 짧디 짧은 독서노트 역사를 돌아보자면, 2018년 9월부터 2019년 11월까지는 몰스킨 줄 노트를 사용했고, 2019년 12월부터 올해 2020년 9월까지 로디아 무지 노트를 썼다.
세 번째 노트는 독일 브랜드인 '로이텀' 사의 도트 노트를 구매했다. 유명한 브랜드의 노트를 종류별로 하나씩 써 보면서 각각의 차이를 몸소 느껴보고 싶었다. 검은색 표지로 통일해서 구매하면 좋았을 텐데 이만 원이나 할인하는 황동색을 선택한 점이 두고두고 아쉽다. 볼 때마다 번쩍거려서 눈이 부시다. 돈이 들어오는 색이라며 위안 삼고 있다.
독서노트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할 무렵 북튜브 채널 <미료의 독서노트>도 같이 시작했다. 몰스킨 말고 다른 노트도 한번 써보라는 구독자분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 몰스킨 유저로 남았을 것이다. 그분 가라사대 '몰스킨의 종이 질이 최근 몇 년 사이 창호지 수준으로 얇아졌다, ' '만년필 필기는 아예 불가능할 정도다' '몰스킨의 시대는 지났다'는 거였다.
몰스킨에 대한 자비 없는 평가를 내린 그는 '로디아' 노트를 써 보면 신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헤밍웨이'와 '피카소' '반 고흐'의 이름을 팔아 예술병에 걸린 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몰스킨의 근거 없는 마케팅에 오랜 세월 홀려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노트로 갈아타기 망설여졌다.
다른 사람들은 몰스킨을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경쟁사에서 파견된 '몰스킨 저격 댓글 부대'라도 있나 싶을 정도로 노트 애호가들의 평가는 가혹했다.
제조 공장을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종이 질이 하락했는데 항간에서는 응가를 닦은 종이를 모아서 만들었다는 괴담이 떠돌았다. 중국에서 버블티 알갱이를 고무 타이어로 만든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종이로 노트를 만든다는 이야기는 처음이라 신선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것은 '메이드 인 차이나'를 무조건 깎아내리려는 심리에 기반한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말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이후로 몰스킨을 면 자동반사적으로 응가가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뼈아픈 비판에 내부 각성이라도 했는지, 응가 소문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최근 몰스킨 노트의 종이질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솔직히 몰스킨 종이 질이 창호지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앞면에 쓴 글씨가 뒷면에 진하게 비치는 점을 문제 삼았지만 사실 0.28mm 정도 굵기의 얇은 펜으로 쓰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고 필기감은 오히려 좋았다.
종이 중량이 더 큰 로디아로 넘어오면서 즐겨 쓰던 유니볼 0.28mm 펜은 잘 쓰지 않게 됐는데 얇은 펜으로 두꺼운 종이에 글씨를 쓰면 필압이 많이 들어 오래 필기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디아 무지 노트를 쓸 때는 0.5mm 굵기의 부드러운 젤 펜을 주로 이용했다. 소문대로 만년필로 필기를 해도 뒷면에 자국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은은한 미색의 종이 컬러도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지만 어쩐지 몰스킨만큼 정이 들지는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나 에밀리 디킨슨이 쓴 노트였다고 하면 단번에 정이 갔을지도 모르지만, 로디아는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를 앞세웠다. 그가 파리를 여행할 때 주황색 메모패드를 들고 다니며 떠오르는 영감을 적었다는 거였다. 코코 샤넬이라면 모를까, 폴 스미스는... (물론 훌륭한 분이시지만)
세 번째 노트는 다시 몰스킨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다른 구독자 분의 추천으로 로이텀 노트를 구매해 봤다. 아직 열 페이지 정도 썼지만 체감상 3개의 브랜드 노트 중 종이 질이 가장 우수했다. 250페이지까지 쪽수가 인쇄되어 있고 맨 앞 장에는 목차를 구성할 수 있는 인덱스 페이지가 있다는 점이 다른 두 노트에 비해 돋보인다.
몰스킨, 로디아, 로이텀 모두 A5 노트인데, 로이텀 노트가 다른 두 노트보다 1-2cm가량 가로로 더 넓다. 별 거 아니지만 이 미세한 차이가 필기할 때 다른 느낌을 준다. 가늠 끈이 두 개인 것도 마음에 든다.
로이텀에 정착해도 좋겠다 싶을 만큼 만족스러운 한편 여전히 몰스킨이 그립다. 가장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노트를 오래 쓰다 보면 그 노트와 나 사이에 우정이 싹튼다. 노트가 친구라고 하면 어쩐지 안 돼 보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남편 다음으로 내 손길이 가장 많이 닿았고, 남편에게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도 그 노트에 다 있다. 어쩌면 나의 노트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트를 쓰는 매일의 내 기분, 하루하루 미세하게 달라지는 나의 태도와 가치, 기록을 통해 배어 나오는 나의 편협함, 고정관념, 무지를 말없이 다 꿰고 있을 것만 같다.
게다가 '몰스킨' 독서노트를 쓸 때는 호주에서 타향살이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마음 둘 곳이 없어서 책을 읽고 독서노트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간을 함께 해줬기 때문에 더 각별하게 생각한다.
네가 응가 닦은 종이로 재활용이 되었다고 해도 나는 너를......
아무튼 '독서노트'라는 걸 쓰기 전까지 나는 '핫트랙스' 같은 문구점에 가면 작은 수첩 하나라도 반드시 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책상 서랍 속에는 각종 노트와 수첩들이 쌓여있었고, 반도 채 쓰지 못한 노트들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새해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그 해의 다이어리를 구매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한 해가 간다. 물론 언니의 옷을 물려받아 입는 심정으로 2021년에도 2020년 일기장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새해 기분이 나지 않는다.
다이어리의 목적이 무엇인가. 새 노트를 사서 새 출발을 해보겠다는 것 아닌가. 망한 년도의 (발음 조심) 일기장을 이어 쓰는 것은 찝찝하기 그지없다. 결국 2020년의 일기장은 1월과 2월 부분만 적힌 채 서랍 속으로 총총.
안 쓰는 물건을 쟁여놓는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 쓰는 물건이 집 안 곳곳에 보일 때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후자에 속한다. 물건들이 '너는 지구의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라고 단체로 시위라도 벌일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때가 되면 1년에 5번 이상 꺼내보지 않은 물건을 정리해서 중고 가게에 기부하는데 그것도 참 미안한 일이다. 대체 누가 1월과 2월 부분이 뜯겨 나간 작년, 재작년의 일기장을 사 간단 말인가.
독서노트 기록 3년 차, 이제는 안다. 내가 매번 노트 한 권을 다 쓰지 못한 이유는 게으르거나 변덕스러워서가 아니라 노트의 용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해서였다는 것을.
보통 일기장에는 하루에 있었던 일을 대충 쓰거나 해야 할 일의 목록, 장 봐야 할 목록을 적기도 했다. 책 속의 한 구절을 필사하기도 하고, 영화 감상이나 강연 후기도 남겨본다. 얼핏 들으면 일기장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정체성이 불분명한 노트는 낙서장이 되기 쉬웠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노트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빼곡하게 채워 세 권째 쓸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용도를 단순화해서 기록의 목표를 분명히 했다는 점이었다. 내 노트의 용도는 Only 독서기록이었고, 기록의 목표는 읽은 책 오래 기억하기, 손글씨 연습 (+ 심신의 안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기장도 '감사 일기' '식단 일기' '다이어트 일기' '연애 일기' 등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그리고 기록을 통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은지를 분명히 하면 기록에 습관을 들이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다보면 눈깜짝할 새에 마지막 페이지를 쓰고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들이 지금 해야할 것은 지금 당장 문구점으로 달려가 '1년 동안 쓸 노트'를 구입하는 것이다. 한 해 쓸 노트기 때문에 질리지 않는 디자인일수록 좋다. 앞서 언급했듯 노트 앞장에는 기록의 용도와 목표를 적어본다. 이를 통해 1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머릿속으로 상상해보고 직접 적어보기도 한다. 노트는 몰스킨이든 로디아든 로이텀이든 상관없다. 내가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쓸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1,000원짜리 흔한 노트도 괜찮다. 저렴한 노트라도 당신이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성들여 기록을 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 노트를 갖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기록을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