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의 흔적, 습관 일지

by 미료

“눈에 보이는 발전이 없을 때 나타나는 좌절감은 탁월함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좌절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니까요. 탁월함을 추구하는 게 쉽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건 좌절감 때문이 아닙니다. ‘조급함’ 때문이죠.”

<타이탄의 도구들_ 팀페리>




시간 가는 속도에 황망해 할 겨를도 없이 8월도 닷새나 흘렀다. 달이 바뀌는 것처럼 나도 뭔가 바뀌었을까. 변화를 거듭한다 해도 결국 제자리일는지 모른다. 자란 만큼의 손톱을 다시 깎는 것처럼 꽉 찬 달이 다시 줄어드는 것처럼, 성장과 퇴보를 반복하다 결국 ‘0’으로 수렴하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라는 생각이 드는 8월 하고도 5일. 치열하고 고달픈 인간의 삶이 고작 ‘0’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니 한때는 그것이 너무나 부조리해 보였다. 열심히 살아도 ‘0’이고 게으르게 살아도 ‘0’ 이라면 후자를 취하는 게 훨씬 타당하고 효율적인 선택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그 두 가지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안다. ‘0’이 되기까지 거듭되는 한 인간의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삼라만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 내가 없어져도 나의 흔적은 남는다는 것을 믿는다. 반면 아무런 운동이 없는 ‘0’은 살아있어도 죽음보다 더 죽음에 가깝다. 어차피 죽지만,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는 이유다.



지난 1월부터 ‘습관 기록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영어로는 ‘해빗트래커(Habit Tracker)로 통용되는데 한국어와 상응하는 번역은 찾지 못해서 ’습관 기록 일지‘라 이름 붙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 새해의 새로운 결심도 새 노트에 담았다. 1월 1일, 일기장이나 노트를 구입하는 것은 연례행사로 올해는 집 근처 독립서점에서 재생지로 만들어진 황토색 표지의 노트 한 권을 사서 첫 페이지에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발췌한 문장을 베껴 썼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구절이었다. 백 퍼센트 공감 가는 문장은 아니었지만 믿음을 가지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을 부여잡고 싶었다. 그게 바로 새해 첫 날의 기분이니까.



2020년, 나를 단련하기 위해 매일 해야 할 목록은 독서(독서노트)와 글쓰기, 명상(백팔 배)과 청소였다. 7개월 넘게 지속하다 보니 이 네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게 보였다. 매일 아침 일어나 이불을 개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하는 루틴 자체가 명상이 되기도 하고, 명상을 하다 글의 소재가 번뜩 떠올랐으며, 글을 쓰다 막히면 책을 읽거나 또 한 번 청소를 했다. 나를 형성하는 것이 단 하나의 습관이 아니라, 여러 가지 습관의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을 하니 어느 것 하나 중단할 수 없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매일 하는 게 물론 쉽지 않았는데 습관 일지를 작성하는 게 큰 도움이 됐다.


습관 일지 양식은 매우 간단하다. 매월, 왼쪽 모서리에 일단 달력을 그린다. 형식적으로 기입하는 것 같지만 다 의미가 있다. 1부터 30 또는 31까지 날짜를 쓰면서 다가올 날들을 헤아려 본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매달 내게 주어지는 720여 시간, 그 깊이와 부피를 가늠하며 주어진 날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기록을 하다보면 아주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생긴다) 그런 다음, 서른 개로 나눠진 직사각형 세 개를 그린 후 (독서와 글쓰기는 하나로 묶어 분류한다) 매일 미션을 수행할 때마다 한 칸씩 색칠한다. 습관 일지 밑에는 먼슬리(Monthly) 스케줄러를 그려넣는다. 딱히 업무가 바쁜 것도 아니지만 표 안에 미주알고주알 써 넣으면 한 달 후 보았을 때, 열심히 살았다는 인상을 스스로에게 줄 수 있다. (인간에게는 실제로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만큼이나, 느낌도 중요한 거였다.)


표는 일부러 자를 대지 않고 삐뚤빼뚤 하게 그려준다. 이유는 없고 그냥 귀찮아서 자를 이용하지 않았는데, 선을 일자로 그리는 능력이 의도치 않게 향상되었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그 달에 본 콘텐츠 목록을 작성한다. 팟캐스트 에피소드, 유튜브 강의, 영화와 책, 음악 등을 적어놓으면 이 또한 나중에 봤을 때 알차게 보냈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쓸데없을 만큼 소소한 기록 – 5월 19일에는 상추 씨앗이 싹을 틔웠고, 6월 18일에는 아빠가 정규직 직장을 얻었다고 전화했다- 도 나중에 보면 재미 뿐 아니라 감동까지 받는다.


습관일지가 아니었다면 분명 네 가지 목록 중 하나는 중도에 포기했으리라. 오늘치의 빈칸을 색칠해야 한다는 기분 좋은 부담감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덕분에 올해는 글도 영상도 예년보다 성실히 만들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눈으로 확인하기란 힘들다. 매일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제자리걸음만 한 것 같은 기분. 습관을 만드는 과정에서 쉽게 지치는 이유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오늘을 기록하다 보면 제자리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된다. 성실함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그 흔적이 우리를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9월이 되기 전까지, 이번 달에도 가열찬 플러스, 마이너스의 날들을 보내고 싶다. 제자리 걸음이라도 성실하게 임하면 발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는 ‘0’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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