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다가 문득 독서노트를 주제로 책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미온수의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샴푸 거품을 씻어내며 , 만일 책을 쓴다면 가제는 무엇으로 정할지 생각하던 중 문득 '무해한'이라는 형용사가 떠올랐다. 독서와 독서노트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취미'였다.
우선 온전히 혼자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나는 소셜 모임에 참여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혼자 시간을 보내는 쪽을 더 선호한다. 책에 집중하거나 필사를 할 때는 별다른 번뇌나 망상이 들지 않고, 깨끗하고 순한 마음을 유지하기 쉽다. 내 안의 여러 가지 정체성 가운데 '고요하고 평화로운 나'를 자주 만난다는 건 여러 모로 즐거운 일이다. 홀로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고 책을 기록하는 순간이 익숙해지면, 다른 누구와 함께 있을 때보다 나 자신을 만날 때가 가장 즐겁다는 걸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넘치는 자기애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자기 연민'에 더 가깝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다양한 타인을 마주치며, 숙명처럼 매일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내게 진정한 휴식을 선물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생생한 '나'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때, 마음은 무해한 상태가 된다.
독서노트를 쓸 때는 유독 청각이 예민하게 깨어나서, 창문 밖으로 들려오는 새소리, 풀 벌레 소리가 더 선명해진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작가, 그리고 책 속의 인물들과 함께 있다. 그들은 언제나 내게 말을 걸고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을만한 질문을 던져준다. 때로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이해해서 위로해 주고 문장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노트를 쓰면서 혼자일 때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한 줄만 적어도 단숨에 마음이 청정해지는 이 취미를 유지하는 데는 별달리 장비가 필요 없어서 돈도 별로 들지 않는다. 다른 취미에 반해 물욕도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 소비욕이라고 해 봐야 소소한 문구류 정도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소소함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내가 속한 '필기의 세계'에서는 소유가 쉽게 미덕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펜 한 자루, 노트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꼼꼼하게 쓰는 것이 목표가 된다. 그 두 가지 물건만 있으면 어디에 가서 살아도 만족할만한 인생을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진리를 독서노트를 쓰면서 배운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소비를 무조건 '악'이라고 여기는 입장은 아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될 때가 있다. 남들이 가진 물건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박탈감, 무언가를 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공허함, 나도 반드시 소유하고 말겠다는 탐욕은 발암 물질 만큼이나 우리 몸에 유해하다.
50,60년대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202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펜과 노트는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다. 너무 흔하고 흔해서, 마음만 먹으면 공짜로 얻을 수도 있다.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두 가지는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기도 했다. 손만 뻗으면 구할 수 있기에 희소 가치가 사라졌지만, 지구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희소성이 높은 물건이다. 진짜 보물들은 언제나 평범한 형태를 띄고 있어서, 길가에 널려 있어도 아무도 줍지 않는다.
독서 노트를 오래 쓰다보면 이것이 단순한 취미나 자기계발의 의미를 넘어 도 닦는 수행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경전을 손으로 적으면서 마음을 닦고, 대중들에게 진리를 전파했다. 독서노트를 쓰는 동안에는 수 만 갈래로 뻗어나가는 온갖 잡념과 고민들이 단 하나의 점으로 귀결해 소멸한다. 좀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제로 해보면 그렇다. 펜과 노트,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잇는 내 몸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몸의 존재를 잊고 산다. 별도의 열정을 발휘할 때, 혹은 과한 열정을 발휘할 때, 그제서야 몸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최근 조금 무리해서 필사를 했더니 오른쪽 새끼 손가락 부근의 근육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내 양손을 펼쳐보며 삼십 년 넘게 왼손과 오른 손이 해온 일에 대해 생각한다. '수고했어'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런 낯 간지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이와 같은 사유는 '손이 없는 상태'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손글씨'라는 말은 과연 적절한가. 신체의 일부가 없다는 것이 결코 결핍이나 손상이 아니라 그 반대일 수도 있을까.
수행이 몸과 마음을 성찰하는 일이라면, 독서노트는 확실히 수행이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떠오른 '무해한' 이라는 형용사가, 유해한 것들에 쉽게 노출된 채 살아가는 내 모습의 반증처럼 느껴졌다. 물건을 살 때 꼼꼼하게 유해 성분이 없는지 따져 고르듯, 내 마음에 유해한 요소들도 걸러내며 살아야 했다. '독서노트 쓰는 법'에 관한 글을 쓰자고 다짐했는데 결국은 나를 지키는 방법에 관한 얘기가 되어 버렸다.
누군가에게 이 <나의 무해한 독서노트>가 '마음 디톡스'를 하고 싶을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일종의 무해한 안식처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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