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5장. 여행의 이유
유경과 동수가 일상의 단편을 글로 묘사하고 서로 단톡방에 올려 공유하는 사이 효영은 여전히 메시지 확인을 하지 않은 채였다. 다섯 번째 모임을 5일 앞둔 날이었다. 유경과 동수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들에 조그맣게 달린 1이란 숫자가 사라졌다. 효영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었다. 효영은 부산에 다녀온 이후 오프라인과 아날로그 스타일로 살았다. 문명의 이기로부터 디톡스 하는 기간이었다. 효영은 운동에 더 열심이었고 건장했던 몸이 조금 더 근육질로 바뀌었다. 무거운 덤벨과 바벨을 들어 올릴 때마다 희열을 느꼈고 정신이 다른 곳에 산만하게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단순한 삶을 살면서 생각도 단순해졌다. 그랬더니 해야만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경계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지난 주말엔 효영은 다시 흰여울마을을 찾았다. 이번엔 하루만 묵고 돌아왔다. 여전히 좋았다. 그러나 같지만 다른 느낌이었다. 흰여울마을은 같았으나 효영이 달라지 것이었다. 어쩌면 효영은 내면의 변화를 확인하게 위해 같은 장소를 찾았던 건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고 글을 썼다. 자발적으로 쓴 첫 글이었다. 제목은 여행의 이유였다. 밤을 새워 퇴고를 한 후 바로 글쓰다짓다 단톡방에 들어가 그동안 읽지 않은 메시지들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글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노트북 전원을 끄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낯선 곳으로
우리의 인생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주어진 운명 그대로 흘러갈 수도, 원래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물길을 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처럼,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낯선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 나는 그것이 인생에서의 여행이라 생각한다. 낯섦에서 오는 불완전한 요소들을 모두 감내하며, 여행을 떠나는 삶이야말로 가치 있는 인생이라 믿는다. 당신은 어떤 인생을 추구하는가.
그동안 살아온 대로 변함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인생의 강물은 한줄기다. 이 한줄기의 흐름은 스스로 노력해 얻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운명처럼 주어진 것이다. 그 흐름으로 평생을 살아왔기에 너무도 익숙하고 편안하다. 그래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흐름은 매우 단조롭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인식의 세계'의 크기는 작을 수밖에 없다. 작은 것도 문제지만, 자신이 보고 이해하는 것이 전부일 거라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그들의 인생에서 어디쯤엔가부터 인식의 범위는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전부가 되었다.
심지어 그 흐름 밖의 세상은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불완전하기에 현재의 흐름을 고수하는 것이 안전하고 현명한 선택이라 믿는다. 그들의 이러한 합리화는 어느새 맹목적인 신념이 되고, 큰 필요를 느끼지 않는 이상 혹은 압도적인 사건을 겪지 않는 이상, 원래의 흐름에 따라 평생을 살아간다. 그들의 인생은 시간에 따라 흘러가지는 하겠지만, 정체된 흐름이다.
그 흐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밖의 세상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은 다른 흐름 속으로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여행을 떠나 직접 경험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새로 배우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물리적인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살면서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낯선 것이어야만 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의 경험만으로 한정지 어진 '나'를 넘어서 새로운 흐름을 타고, '인식의 세계'를 넓혀갈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확장됨으로써 전부라 생각했던 것들이 일부였음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임을,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이해됨을 경험하게 된다.
낯선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디면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어색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야 할 것들 투성이고, 알게 된 것들도 각각이 마치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운동을 처음 배울 때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세를 얼추 흉내 내보지만 생전 처음 쓰는 근육을 사용하려니 뭔가가 엉성하기만 하다. 왜 그런 자세로 해야 하는지에 이유는 알지만, 머리가 아는 것이지 몸이 아는 것은 아니기에 생각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다. 나의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누구라도 볼까 봐 민망하고 부끄럽다. 이렇듯 낯선 것을 경험할 때 따라오는 불완전한 요소들은, 다시금 익숙하고 편안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게 만든다. 이 길은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어서 돌아가는 일이 훨씬 좋은 선택이라고 합리화와 자기 위로에 빠져버리기 쉽다. 익숙한 것에서 빠져나올 때에도 용기가 물론 필요했었지만, 이때야말로 용기가 필요해진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부딪쳐보겠다는 어쩌면 막무가내처럼 보일 수 있는 당돌함이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원래 그런 거지'라며 스스로를 달래야 한다. 생전 처음 겪는 것이니 잘 안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곧 익숙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 용기와 믿음은 여행 필수품이다.
시간은 흐른다. 여행에서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 때가 온다.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에 대해 수많은 방법들을 제시하는 요즘, 어쩌면 이것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묵묵히 그 낯선 흐름에 고군분투하며 견뎌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미소는 성취한자만이 지을 수 있는 고귀한 미소다. 성장이 주된 목적은 아니었지만, 여행가는 어느새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다. 이처럼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불완전하고 불편하지만, 그 모든 힘듦을 덮을 만큼 더 큰 좋은 것으로 되돌아온다. 만약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이라도 얻고자 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지금 당장 떠나라. 새로운 흐름 속에 자신을 던져라. 그리하여 수많은 물줄기를 가진 강물이 되자.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효영은 주연이 보낸 메시지에 답을 보냈다. 짧고 정중한 거절의 메시지였다. 한 달 하고도 이 주가 지나고 있었다. 효영은 주연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헤어졌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의미를 넘어선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효영은 더 이상 현재의 효영이 아니었다. 현재의 효영은 과거의 효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단순한 삶을 지난 몇 주간 살면서 효영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효영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효영은 그다지 큰걸 바라지 않았다.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공감해 주고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며 함께 손잡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집착이 아닌 존중을 원했다.
동수는 효영의 글을 천천히 읽고 생각에 잠겼다. 힘든 순간을 겪어낸 글이었다. 어떤 비장한 기운도 느꼈지만 그것보다는 효영의 건강한 내면이 더욱 단단해졌다고 느꼈다.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정착'을 유지하라는 관성에 저항하여 '떠남'을 선택하고 용기 내어 그 험한 여행길에 오르신 너를 마음 다해 응원해. 이 글 속엔 어떤 논리가 말끔하게 전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표현이 되어 있고 그게 잘 느껴져. 글은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예전에 말했듯이 진정성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거든. 기술적인 것이야 글쓰기를 배우면서 조금씩 갖춰가면 되는 일인데, 진정성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야. 효영이만의 고유한 언어를 장착하는 과업도 그 글쓰기 여행 속에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해. 문학적 감수성을 타고난 효영이는 이 머나먼 여정 중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타자를 배려한다거나 양보한다는 거짓겸손 뒤에 숨지 말고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 있게 표현하여 스스로를 방어하고 지켜낼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를 갖추게 되리라 믿어. 자기 생각을 근거를 갖춰서 논리적으로 풀어낼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만 나중에 그것을 내려놓을 수도 있고, 마침내 타자를 배려하고 그들에게 양보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를 찾지 않으면, 찾은 나를 내 목소리로 표현하지 못하면, 결코 타자를 위한 삶을 살 수 없을 테니까. 화이팅이야. 힘든 시기를 통해 이런 깨달음을 얻고 돌아와 기뻐.
유경도 효영이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기뻤다. 동시에 효영의 글을 읽으며 조금은 깊어진 듯한 내면의 성찰이 느껴졌고 유경도 같은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효영의 글에 댓글을 남기는 대신 좋아요를 누르고 곧장 글쓰기에 돌입했다. 이번엔 글이 술술 써지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가 정해준 주제가 아닌 스스로 정한 주제로 쓰고 싶어 쓰는 글이 확실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에서 일을 마친 후 늦은 오후부터 조금씩 쓰기 시작했던 글을 자기 전에 완성할 수 있었고, 그다음 날 새벽에 퇴고하여 단톡방에 올렸다.
나를 찾아서
닭장에서 알만 낳아야 하는 암탉이 있었다. 그 속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날개를 푸덕거릴 수도, 자신이 낳은 알을 품어 볼 수조차도 없었다. 발끝으로도 만져 볼 수도 없는 알이 바구니에 담겨 떠나는 것을 볼 때면, 알을 낳을 때 느꼈던 뿌듯한 기분은 곧 슬픔이 되어 버리곤 했다. 매일 반복되는 허탈함에 암탉은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암탉에게는 남모르는 소망 하나가 있었다.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암탉은 이 소망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잎사귀가 또 꽃을 낳았구나!’
바람과 햇빛을 한껏 받아들이고, 떨어진 뒤에는 썩어서 거름이 되는 잎사귀. 그래서 결국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잎사귀를 보며 암탉은 소망했다. 자신도 아카시아의 그 잎사귀처럼 뭔가를 해내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게 된 암탉은 병든 닭들과 함께 버려졌고, 자신을 구해 준 청둥오리 덕분에 꿈에 그리던 마당을 밟게 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을 반겨주지 않는 마당 생활은 생각보다 서글프고 눈물겨웠다. 보금자리를 찾던 암탉은 찔레 덤불 속에서 알 하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 알을 정성껏 품어 생명이 탄생하는 기쁨을 맛본다. 청둥오리와 그의 짝이 남긴 생명이었다. 암탉은 마음을 굳게 먹고 어둠 속을 걸어 나간다. 발톱에 힘을 주고, 부리를 굳게 다문 채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마당을 떠난다. 그 어느 곳도 안정된 보금자리가 되어 줄 수 없어 나그네처럼 늘 떠돌아야 했지만, 온 힘을 다해 어린 생명을 지켜나간다.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어. 소망을 간직했기 때문일까. 그래도 마당을 나온 건 잘한 일이야. 철망은 말할 것도 없고.’
소망을 가진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힘겹고 고되긴 했지만, 그 어려움이 암탉의 발걸음을 마당과 철창으로 다시 되돌리게 하진 못했다.
나는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살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뚜렷한 내 인생의 방향과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찾지 못한 채 그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왔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평가에 귀를 열고 살았다. 인정을 받고 박수를 받으면, 그 순간 잠시 기쁨이 찾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의 상황이 될 때면 나는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모질고 매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를 높여 주던 우월감은 한순간에 얼굴을 바꾸고 나타나 나를 열등감으로 몰아넣었다. 넌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그게 당연한 거라 끊임없이 나를 설득시켰다.
나는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 걸까? 타인의 시선을 왜 그렇게 의식하며 살아야 했을까?
나는 요즘 나를 만나는 여행을 하고 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나,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 통로는 다름 아닌 책, 문학이다. 예전의 나에게 소설이란 그저 허구적인 다른 세상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 제쳐두곤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있었다. 내가 나를 몰랐던 이유는 아는 방법을 몰랐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경험의 폭이 너무나 좁았던 탓에, 나는 나를 모른 채 그저 상황에 나를 내맡기며 살아온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어떤 나를 만나게 될까?’
이전에는 없었던 기대이다. 그 앎의 여정 앞에서 나는 가슴이 뛴다. 나를 알아가고, 내 목소리로 나를 표현할 기회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몰랐던, 누구도 대신 가져다줄 수 없는 희열이다.
“잎싹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헛간에서 피둥피둥 살만 찐 오리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자신이 온 힘 다해 지켜 온 오리도 품을 떠나고, 돌아갈 곳도 없이 홀로 남은 암탉 ‘잎싹’. 비록 겉모습은 마르고 볼품없어졌지만, 잎싹은 다른 어떤 암탉보다도 훨씬 우아하고 당당해져 있었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며, 목숨 정도 부지할 수 있는 안정된 철장과 마당으로 다시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를 보면 그저 부러웠다.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주눅 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내가 좋다. 다른 누구보다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내가, 참 좋다.
“길들여진 오리는 자기 알을 품지 않는다.”
사람은 대개 안정적인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익숙한 것이 편하고 낯선 것은 불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길들여진 삶에는, 꿈과 희망이 없다. 미래에 대한 소망 없이 오늘에 만족하며 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족(自足)이 될 수는 없다.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싶다. 이전에 알던 나보다 더 깊고 넓은 지점에서 나를 마주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그 어떤 여행보다 의미 있고 값진 여정. 나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그 여정 가운데 이렇게 서 있다.
유경의 글을 읽고 동수는 또다시 결연한 유경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경은 분명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댓글을 남기려고 했는데 효영이 한 발 빨랐다.
암탉이 꽃을 피워내는 잎사귀를 보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소망했듯이, 유경이에게 있어서 소설은 잎사귀라고 볼 수 있겠네. 나에게 있어서도 소설과 글쓰기는 잎사귀야. 철장 안의 그 조그만 곳에서 얻을 수 있었던 건 '목숨 정도 부지할 수 있는' 안정감뿐이었다는 말이 인상 깊게 다가왔어. 어쩌면 나의 과거도 목숨 정도 부지 할 수 있는, 의미라고는 딱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삶이었지 않나 싶어. 이제는 마치 철장밖의 넓은 세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이야. 다만 이 또한 더 큰 철장일 뿐 얽매여있다는 건 똑같을지도 모르니 끊임없이 더 넓은 세계를 소망해야겠다고 생각해. 이 여정을 너희들과 함께해서 참 좋아. 좋은 글 잘 읽었어.
동수도 질세라 답글을 남겼다.
내 목소리를 찾아 나를 알아가는 과정, 그렇게 알기 시작한 나를 내 목소리로 표현하는 과정, 이 모두가 여행일 거야. 끝도 없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을 것이며, 안정적인 정착에 대한 갈망이 커질 때를 맞이할 것이고, 다양하고 다채로운 내외면의 상황 탓을 하며 왜 이 여행을 떠났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설 때도 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을 용기를 내어 떠나 순례자의 길에 오르신 유경이 너를 무한 응원해. 우물 안에 갇힌 행복한 바보가 아닌 우물 밖을 스스로 탈출하여 고민하고 성찰하여 통찰력을 가지게 되는 지혜자의 길로 접어든 유경이를 환영해. 소수이지만 같은 길 위에 의외로 많은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더 많이 알게 될 거야. 읽고 쓰고 운동하고, 마침내 살아내는 유경이가 되길 기도할게.
그리고 동수도 몇 시간 후 같은 주제로 글을 써서 올렸다. 효영과 유경의 글이 어떤 영감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었다.
낮추기 위해 찾는 여행
세상의 모든 여행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난다. 인생도 나의 존재함으로 시작해서 나의 존재 없음으로 끝나는 하나의 긴 여행이다. 존재함과 존재 없음 사이 역시 작은 여행들로 이뤄진다. 이 세상에 던져진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의 긴 여행과 그 여행을 이루는 여러 작은 여행들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인간은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이다.
'유'에서 시작하여 '무'로 끝나는 인생이라는 여행의 이유는 곧 인간 존재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 모두가 아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도 모르는 그 이유 말이다. 그러나 그 여행을 이루는 작은 여행들은 저마다 이유를 가진다. 뿐만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시작도 끝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조절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즉 모든 인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나의 긴 여정을 이유가 있고 조절이 가능한 여러 작은 여행들로 채우게 된다. 이로써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인생이라는 긴 여행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무채색의 텅 빈 인생이 저마다 다른 색을 띠며 세상이라는 향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여행 포인트가 있다. 모든 여행의 주체는 나 자신이라는 것. 누군가에게 떠밀려 시작한 여행이라 하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여행의 의미는 즉각 상실된다. 그리고 의미를 상실한 여행은 공허로 기록된다.
공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아무 의미도 찾아내지 못할 때 발생한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중 유일하게 존재를 묻고 저 너머를 궁금해하며 초월을 꿈꾸는 의미 중독자이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자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닌 상태가 된다. 말하자면 '나'이면서도 '나'이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인데, 이는 길 위에 수두룩하게 존재하는 ‘나’라는 이름의 깊은 수렁에 빠지기 때문이다. '나'에 빠져 '나'를 잃게 되는 것, 이는 곧 인생을 공허로 가득 채우는 자이며 그의 이름은 교만과 자기기만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길을 걸어가되 나에게 빠지지 않고 나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한 인생에 색을 입히고 고유성을 갖게 하는 여러 작은 여행들의 궁극적인 이유이다. 나에게 빠지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나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이 아이러니! 주체가 되지 못한 자는 영원히 타자를 위해 살 수 없다. 희생할 자아가 없는데 어찌 타자를 위할 수 있겠는가. 낮출 자아가 없는데 어찌 겸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를 찾는 여행은 나를 낮추기 위한 준비단계로 소급된다. 궁극적으로 나를 찾는 여행은 나를 낮추는 여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의 존재함으로 시작한 여행은 나를 찾는 여행으로, 나를 찾는 여행은 나를 낮추는 여행으로, 나를 낮추는 여행의 끝은 나의 존재 없음으로 수렴하는 우리의 인생. 당신은 어느 단계에 속해 있는가?
동수의 글에 효영이 먼저 답글을 남겼다.
내가 주체가 되어 길을 걸어가되 교만으로 빠지지 않는 일이란, 읽고 쓰는 것이 삶에 기본장착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야. 읽고 쓰기가 일상이 된다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일상이 된다는 것이니, 어찌 '나'에게 빠질 수 있을까. 네가 말한 그 여행에서의 필수품은 '읽고 쓰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나는 아직 '나'를 발견하는 단계에 있는 것 같아. 아직 '나'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낮아지려고만 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야. 나의 여행이 언젠가는 나를 낮추는 여행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 타자를 위하는 인생이 되길 바라.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었어.
유경도 다음과 같이 답글을 남겼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모두에게 주어진 인생이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존재의 ‘의미’는 각각 달라지는 것 같아. ‘인간은 초월을 꿈꾸는 의미 중독자’라는 정의에 공감이 돼.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저 먹고사는 일에만 집중하다 사라져야겠지. 외적으로 만들어낸 '나'가 존재의 전부라면, 사람은 끝없는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키재기만 하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한지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야.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진정한 나를 발견해 가는 일을 성실히 해나가는 것. 그 발견 속에서 겸손을 배워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겠지. 인생의 끝에서 만나게 될 ‘존재 없음’까지도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값진 여행, 나도 그 여행길 끝까지 걸어가고 싶어. 너희와 함께 해서 영광이야!
셋은 글쓰기라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해내지 못하는 이 간단한 행위를 통해 서로 깊은 동지애를 느꼈다. 글쓰기가 가져다준 유익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