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6장. 다섯 번째 만남
거의 두 달 만에 모인 유경과 효영과 동수는 불과 네 달 전과 비교해서 무언가 크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특히 효영의 결단이 그 기간 중에 있어서 효영 자신뿐 아니라 유경도 동수도 모두 다행이라 여겼다. 만약 글쓰기를 통해 위로와 치유, 그리고 성찰을 하지 못했다면 효영은 아마도 주연의 메시지에 그대로 순응해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다섯 번째 만남에서 효영이 직접 그렇게 토로하기도 했다.
효영의 얼굴이 밝아 유경과 동수는 마음이 놓였다. 효영에게선 뭔가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하는 법이다. 파괴는 곧 새로운 창조를 위반 발판이기에 우린 그 파괴를 찬란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동수가 먼저 겪었고, 유경과 효영도 각자의 삶의 콘텍스트에서 그 과정을 착실하게 거치고 있었다.
차가운 아이스티를 마시며 효영이 말을 꺼냈다. 최근에 걸려온, 잊고 지내던 옛 친구의 전화로 인해 인간의 모순됨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동수는 효영이 이렇게 철학적이었나 싶은 생각에 귀를 더 기울였다. 효영이 말을 이었다.
어제였어. 진짜 완전히 잊고 있던 대학 동기 이름이 요란한 진동과 함께 휴대폰 화면에 떠오르더라구. 오랜만에 마주한 이름 하나에 얽힌 많은 기억들이 자연스레 소환됐지. 마치 누워 있던 기억들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것 같았어. 다행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친구여서 그랬는지 반가운 기분에 웃음이 나오더라구. 전화를 받고 너스레를 떨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어. 그런데 그 녀석이 대뜸 최근에 정규직이 되었다고 말하는 거야. 당연히 나는 축하를 건넸고 녀석은 고마워했어. 조만간 밥 한 끼 하자는 약속도 하고 우린 전화를 끊었지. 그런데 전화를 끊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야. 뭐랄까… 갑자기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거였어.
효영은 다 마신 아이스티 잔에 담긴 작은 얼음 하나를 물고 계속 말을 이었다. 혼란스러웠어. 정규직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던 것 같아. 알다시피 난 아직 비정규직이잖아… 정규직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나는 그 녀석과 나를 비교했고, 내가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친구의 좋은 소식에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내가 참 못나 보였어.
그리고 효영은 스스로에게 하는지 유경과 동수에게 하는지 모를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타인의 행복에 온전히 기뻐하는 게 가능할까? 불쾌함 없이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
동수는 효영의 말을 들으며 모순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인간의 모순된 마음, 이율배반적인 본성은 최근에 읽기 시작한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였다. 유경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효영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본 적이 있기도 했고, 겉모습과 속모습이 다른 자신의 이중적인 마음에 종종 절망했던 지난날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경과 동수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기… 유경은 동수가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수도 유경의 얼굴을 보고 똑같은 걸 느꼈다. 동수가 말했다. 유경아 네가 말해. 유경이 말했다. 우리 이번 글쓰기는 모순에 대해서 써보는 게 어떨까? '내가 가장 모순을 느낄 때' 정도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너네 생각은 어때? 동수는 흐뭇해하며 유경의 말을 이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효영이는 이미 좋은 주제를 생각나게 해서 안 써도 될 것 같긴 한데, 글로 쓰면 또 다를 테니까 써보길 추천해. 그리고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게 되면 이런 주제를 조금 더 깊고 풍성하게 생각할 수 있을 거야. 그렇잖아도 나는 도스토옙스키 전작 일독을 요즘 거의 마쳐가고 있거든. 곧 독서모임도 하나 열어볼까 해. 이름도 정했어.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어때? 뭔가 있어 보이지 않냐? 너스레를 떠는 동수의 모습을 보며 유경과 효영은 웃음을 지었다. 한 발 먼저 앞서 있는 동수가 부럽기도 했고 동수처럼 더 많이 읽고 쓰고 싶었다. 유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와, 도스토옙스키라구? '죄와 벌' 맞지? 그리고 까라마조프 뭐시기 하는 것도? 동수가 웃으면서 맞아, 잘 기억하네,라고 응답했다. 효영 역시 나도 고등학교 때 필독도서라고 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어. 하나도 기억나는 건 없지만. 모순과 이율배반성이 다뤄진다니 관심이 가. 나도 그 독서모임 열면 함께 할게. 유경도 나도, 라며 참가 의견을 밝혔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7시를 넘겼지만 밖은 여전히 밝았다. 하지가 지난 지 일주일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에어컨 바람 때문에 옷깃을 여미며 유경이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는 모순에 대해 생각해 보고 글을 써보는 거야. 점점 더 깊어지는 듯한 기분인데? 할 수 있을까? 유경이 의심스러운 말투로 질문을 던지자 동수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이지. 지금은 도스토옙스키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우리 안의 모순된 심리 같은 걸 사실 그대로 드러내어 관찰하고 성찰하면 될 것 같아. 그런 경우는 넘쳐나지 않냐? 유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효영도 마찬가지였다. 카페를 나서며 서로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동수는 유경과 효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예전과 달리 어떤 조용한 힘이 느껴졌다. 글쓰기를 제안해서 유경과 효영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동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을 느꼈다.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제대로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동수도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