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7장. 내가 가장 모순을 느낄 때
동수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대해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해오던 터라 모순이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잘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의외로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손을 놓고 잠시 휴지기를 가졌다. 글쓰기는 성실히 관건이지만, 성실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길 2주가 지났고 유경이 먼저 글을 올렸다.
꿈과 현실 사이
‘생명 살리는 일’에 아낌없이 일생을 바치는 사람을 존경한다. 안정적인 삶을 뒤로하고 가치 있다 여기는 일에 과감하게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그 용기에 가슴이 뛰기도 한다.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아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내 집 마련’의 꿈은 없다. 물론 남편의 직장 덕분에 현재 머무는 집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 아등바등 돈을 모으지는 않는다. 남편이 퇴직한 후 자녀들이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나는 날이 오면, 조금 더 작은 집에서 소박한 살림을 꾸려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남편과 가끔 ‘나중에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서 봉사하며 살면 어떨까’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꿈은 꿈일 뿐이라는 생각에 부딪힐 때가 있다. 추운 겨울 따뜻한 물을 마음껏 사용하고, 더운 여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을 때면, 문득 ‘물이나 전기가 자주 끊기는 곳은 힘들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픈 곳이 있어 병원을 찾을 때면 ‘병원이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곳에는 못 갈 것 같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타인을 위한 삶을 꿈꾸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과 내 손과 발은 나를 먼저 향한다. 누군가를 위해 불편함을 선택하기보다 내가 누릴 편안함에 더 마음을 둔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 한계를 넘어서는 희생은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내가 모순을 느끼는 지점이다. ‘내가 느꼈던 감정, 글과 말로 뱉었던 말들은 진짜였을까? 이렇게 붙잡을 것이 많은 내가 무엇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예상치 못한 질문들이 화살이 되어 갑자기 나를 공격할 때면, 그런 나 자신이 실망스럽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이타적 삶을 꿈꾸면서도 때론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모순 속에 살아가는 나. 그게 바로 ‘나’이다. ‘되고 싶은 나’와 그렇지 못한 나의 모습이 내 안에 공존한다. 과연 모순 없는 삶이 있을까? 완벽하게 일관된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중요한 것은 ‘모순‘에 대한 나의 인식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이다. 밀고 끌어당기는 두 개의 힘이 내 안에서 충돌하며 모순을 일으키는 것,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둘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삶으로 부딪쳐 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지닌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위축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추구하는 이상향을 좇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결국, 모순이란 내가 인정하면서도 극복해야 할 인생의 과제와 같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의 꿈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해도, 나의 대답에는 변함이 없다. 여전히 나는 이타적인 삶을 꿈꾼다.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이기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꿈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소망을 못 본 체하지 않고 꾸준히 글과 말로 표현하며 살고 싶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내가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품은 꿈을 부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나를 이해하고, 때로는 격려하며 내게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가고 싶다. 묵묵하게, 끝까지.
짧지만 단단한 글이었다. 동수는 유경의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긴 뒤 휴지기를 끝내고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간의 본성과 심리에 대한 성찰과 통찰이 잘 스며든 글이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이 부인할 수 없는 거리를 좁힐 수는 없겠지. 그러나 그 거리에 대한 정의를 달리 할 수는 있을 거야. 유경이가 쓴 ‘모순이란 내가 인정하면서도 극복해야 할 인생의 과제와 같다.’란 문장에 이 글 전체를 함축할 수 있을 것 같아.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도스토옙스키도 읽지 않았는데 벌써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어. 이런 글을 쓸 수 있게 된 유경이를 응원해. 머리로만, 감정적으로만 알아채다가 이제 텍스트로 형상화시키고 있는 유경이의 발전을 더욱 기원하게 됩니다. 철학과 인문학 공부가, 나아가 문학으로 인생과 인간을 탐구하다 보면 더욱더 깊고 풍성한 통찰과 글쓰기를 할 수 있게 될 거야. 화이팅이야!
이번엔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유경의 글이 어떤 영감을 준 것이었다. 동수는 살짝 퇴고를 하고 글을 올렸다.
자기 중심성의 이면
기도에 관한 글을 쓰느라 기도하지 못했다는 사람의 이야기, 절대 큰소리치지 말라고 큰소리치며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 폭력을 휘두르며 결코 폭력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피식 웃음이 났다. 본능적으로 모순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를 때 모순을 느낀다. 그러나 함부로 그런 사람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정도만 다를 뿐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 살아온 대로 산다. 이성을 사용할 수 있으나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관성에 이끌려 습관대로, 다분히 감정에 지배당하며 산다. 이성은 주로 살아온 대로 살다가 발생한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을 수습할 때 가장 활발하게 작동된다.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원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란 존재 자체는 모순을 머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가장 모순을 느끼는 상황 역시 인간의 근원적인 속성과 관련된다. 말과 행동 간 괴리보다 더 치명적이고 파괴적이기까지 한 모순을 나는 자기 중심성에서 찾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지만, 병적인 자기 중심성은 사람을 극도로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만든다. 그런데 정작 이기적이고 교만한 당사자는 자기에게서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누군가 말해줘도 인정하기는커녕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미 그는 자기 안에 갇혀 객관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객관성의 상실. 이것은 병적인 자기 중심성이 이르는 피할 수 없는 종착지이며 끝내 파국을 초래한다.
이런 모순이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이유는 본인만 그 모순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을 바라보다가 모든 게 자기로 이뤄진 우주 속에서 자기만의 질서와 평안에 잠식되어 결국 자기조차 보지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 세상 가장 큰 모순. 너무나도 견고한 자기만의 성에 갇혀 왕이 된 나머지 타자도 세상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분별하지 못하는 폭군으로 전락하는 이 비극의 끝은 모두의 파멸을 가져온다.
무한하고 영원한 저 너머를 꿈꾸며 존재의 이유를 묻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은 유한하다. 인간은 존재론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모순된 속성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존재론적인 겸손의 첫 시작이며 진정한 초월의 발판이자 겸손과 초월의 역설이다. 그것은 곧 자기 중심성이라는 영혼 저 깊숙한 곳에 각인된 쓴 뿌리에 저항하는 것이며, 천박한 인간스러움에서 벗어나 마침내 고결한 인간다움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나 역시 모순되고 이율배반적인 인간이라는 것. 나 역시 상황과 내 안의 상처와 감정에 좌우되어 종종 객관성을 상실하기도 하는 인간이라는 것. 그러면서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나보다 약한 타자 위에 군림하려 하는 인간이라는 것. 죄로 더럽혀지기 전부터 내재된 인간다움을 뒤로하고 타고난 자기 중심성으로 쉽게, 아주 쉽게 이기적이고 교만한 인간스러움을 따라가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 이것들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효영은 인간스러움과 인간다움의 정의를 새롭게 내린 동수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효영이 먼저 댓글을 달았다.
인간의 근원적 속성인 '자기 중심성'이 '객관성의 상실'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깨닫게 해주는 글인 것 같아. 누가 봐도 모순인 걸 스스로만 모른다는 건 소름 돋도록 무서운 또 하나의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건 스스로여야 할 텐데 말이야. 이렇듯 객관성을 상실하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어. 좋은 글 잘 읽었다.
유경은 동수의 글에서 뭔가 철학적인 깊이를 느꼈다. 사실은 동수가 말한 도스토옙스키를 그렇잖아도 한 권 사서 읽고 글을 썼던 것이었다. 문학만이 아니라 철학도 중요한 것 같아 철학 입문서도 하나 사서 꾸역꾸역 읽어나가고 있었다. 깊이와 풍성함을 모두 놓치지 않고 조금씩 갖춰가는 유경은 머지않아 작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유경이 남긴 댓글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겸손함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 자존심을 내세워 진실을 덮어 버린다면, 당장에 드러날 무안함은 가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진실한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겠지. 사람이 우물에 갇혀 사는 것처럼 무섭고 가련한 일이 없는 것 같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무지’의 반증이 되니까. 어제 철학 고전 강의 책 앞부분에서 읽은 ‘무지의 지’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어. 무지함을 아는 것, 그것이 자기중심적인 모순을 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구. 나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배우고, 끌어안는 사람이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