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8장. 내가 깊은 기쁨을 느낄 때
동수는 최근 유경과 효영과 함께 한 나날들을 돌아봤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감동이 밀려왔는데, 동수는 그걸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쁨이었다. 동수는 이 감동을 기념하고 싶어 글을 쓰기로 했다. 가끔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봇물 터지듯 글들이 쏟아져 나올 때가 있다. 동수가 겪고 있는 상황이 바로 그랬다. 한 시간 만에 글을 완성하고 손 본 뒤 단톡방에 너희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사람이 살아날 때
잘 울지 않는 내가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한다. 그건 바로 사람이 살아날 때다. 사람에게 구원이 임할 때다. 내가 깊은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고, 내가 살아있는 이유, 살아야 할 이유를 다시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람은 저마다 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람 자체가 하나의 빛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모를 수 있어도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볼 수 있는 생명의 빛이다. 이 빛은 무한과 영원으로부터 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에 제한된 사람이 유한한 몸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유한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까닭, 시간에 제한되어 있지만 영원을 꿈꿀 수 있는 까닭은 내재된 빛이 있기 때문이다. 그 빛은 살리는 힘이 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한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다. 그 힘만이 어두움에 빠진 사람을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저 문장들을 '어두움에 빠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라고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흘러간 시간보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지금 내가 허투루 보내고 있는 시간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해야만 할 일들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 밖 영원의 눈을 통해 시간에 제한된 나와 타자와 세상을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눈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누군가에겐 다시 태어나는 순간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렇게 눈이 깊어진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은 거짓이 없고 겸손하여 모든 거짓을 관통하고 모든 교만을 꿰뚫는다. 무엇보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진다. 백발의 노인도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아이의 눈이다. 나는 이를 지혜라고 부른다. 이 지혜자에게 스스로의 유익은 더 이상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어두움에 빛이 임하는지, 사망이 생명으로 옮겨지는지,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게 되는지에 모든 삶의 목적과 방향이 정해진다. 기쁨도 이러한 것들이 성취될 때 선물처럼 찾아든다. 기쁨은 빛의 전도사가 되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내 안의 빛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그 빛을 잃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잊어버릴 때마다 나는 기쁨을 상실한 사람이 되어 공허하고 혼돈된 상태로 치닫게 된다. 그러다가도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순간들이 있어 나는 다시 기쁨을 회복하면서 내 안의 빛을 자각하게 된다. 바로 사람이 살아날 때다. 사람에게 구원이 임할 때다. 내가 깊은 기쁨을 회복하는 순간이고, 내가 살아있는 이유, 살아야 할 이유를 다시 발견하는 순간이다. 누군가로부터의 빛이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 들어가는 광경. 어두웠던 영혼이 함박웃음으로 밝게 피어나는 광경.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광경들.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한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하게 된다. 나는 평생 이 기쁨의 전도사가 되기로. 누군가에게 빛을 전해주어 그 사람이 살아날 수 있도록 돕기로. 그래서 그 사람도 빛을 인지하고 제2의 전도사가 될 수 있도록 돕기로. 그 깊은 기쁨을 가능한 자주 느낄 수 있는 너와 내가 되기로.
유경, 효영, 동수, 단 세 명이 모인 글쓰다짓다 글쓰기 모임은 6개월간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다.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그 세상의 일부인 셋의 눈과 마음과 생각이 달라진 것이었다. 그러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글쓰기 하나만으로 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 놀라워했다. 다음 달엔 기념이나 하자며 동수가 단톡방에 제안을 했다. 우리 시간 내서 어디론가 멀리 떠나서 당일치기로 바람 좀 쐬자. 어때? 유경은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살짝 부담을 느꼈지만, 당일치기라는 단어에 꽂혀 좋아요를 눌렀다. 그때 효영이 댓글을 달았다. 이제 글쓰다짓다 2학기가 시작되는 거냐? 동수는 효영의 댓글에 움찔했다. 속을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랬다. 동수는 2학기 글쓰다짓다를 조금은 다른 형식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1학기가 나를 찾고 성찰하는 시간이었다면, 2학기는 눈을 외부로 돌려 타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1학기 내내 스스로를 돌아봤고 각자의 삶에서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 시선의 변화는 분명 좋은 글로 열매 맺힐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2학기에는 문학과 철학을 함께 읽어나가며 글쓰기 재료가 바닥나지 않도록 조율할 작정이었다. 문학이 사유와 경험의 풍성함을 더한다면, 철학은 그 풍성함 이면에 숨어 있는 어떤 원리 혹은 관점을 갖게 해 주어 깊이를 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셋은 각자가 다른 생각을 했지만, 모두 2학기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