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하는 축복
오늘 우스갯소리로 동료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운동을 하며 몸을 움직이며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체감한다는 것 자체가 축복일지 모른다고. 이 말에 대한 반응으로 노화를 체감하는 게 왜 축복이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숨 쉬기 운동만 하며 일상을 살아가게 되면, 다시 말해 몸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생활 패턴에 길들여지게 되면 몸의 노화를 알아채는 데에 둔할 것이고,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해서 노화가 안 일어나는 것도 아닐 테니, 누구나 겪는 노화를 매일 체감하는 편이 오히려 더 건강한 생활습관에 가깝다는 논리다. 몸이 안 좋아지고 있는 걸 아는 편이 모르는 것보다 낫지 않냐는 말이다. 게다가 그것을 알아채고 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은 극복하려고 애쓰는 시도도 할 수 있으니 이게 축복 아니면 무엇이겠냐는 말이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혼자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이 들어 인간관계를 과감하게 정리하고 혼자 살아도 된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리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한결 같이 충분히 먹고살 만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기에 잘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진공 속 철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혐오한다.
말이 곁길로 샜다. 인간관계를 하다가 생겨나는 피치 못할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과 무조건 거리를 두고 물과 기름처럼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본다. 참 인생 편하게, 이기적으로 산다 싶다. 위에서 몸에 대한 예화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보면, 차라리 갈등을 겪고 그것을 해결하든지 끌어안든지 하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대안을 서로가 강구하면서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편이 나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낫다고 믿는다. 갈등이 없으면 관계는 깊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에도 나는 동의를 표한다. 누군가가 내 일상에 들어와 어떤 시공간을 차지할 만큼 소중하게 느껴지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천생연분이란 이론 혹은 미신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관계는 갈등을 어떻게 해소시켜 가는지에 방점이 있다. 운동을 하면서 노화를 체감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선에서 저항하는 자세를 갖는 방식이 건강을 지키는 정석인 것과 매한가지다. 만나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가 잘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면 지혜롭게 처리해 나가는 용기가 슬기로운 인간관계의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운동을 지속하면서 몸의 어느 부분이 약하고, 또 어느 부분을 보강할 수 있는지, 어떤 운동으로 그것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