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네모의꿈 Dec 18. 2023

매일 아침 울면서 한강 5km를 뛰며 생각한 것들

안에서 우는 것보다 밖에서 우는 게 낫다

"회원님은 바디프로필 찍기는 어려우실 것 같아요. 3개월 동안 무리한 목표는 세우지 마시고 그냥 운동을 제대로 배우는 것에 집중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른 회원들은 트레이너들이 40회 PT를 끊으면 바디프로필을 찍자고 제안한다고 하던데, 난 찍고 싶다고 먼저 당당히 말하고 대차게 거절당했다.


그의 성격답게 엄격하고 단호한 거절이었다


"저.. 열심히 해보면 안 될까요 선생님? 요새 좀 우울했는데..이건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내 돈 주고 내가 애원하는 것도 좀 웃겼지만, 그래도 거절당할 줄은 몰랐기에 다시 한번 말해봤다.


거절이 어이 없었지만 그래도 배우는 입장에서 한번 더 부탁했다


"회원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운동 수행 능력이 떨어지세요. 배우는 것도 느리시고요.


개인 운동을 매일 나오시는 편도 아니고, 식단도 좀 프리하게 하시고.. 그래서 아마 3개월 내에 원하는 몸을 못 만드실 것 같아요. "




내 심장에 칼을 꼽는.. 합리적인 거절이었다. 반박 불가능이었다. 사실 내가 피티 수업 10회 차 동안 식단도 조금 프리하게 했고, 수업은 주 2회 나갔지만 개인 운동을 칼같이 매일 나간 건 아니니까 말이다.



내가 전 남자 친구에게도 거절당했는데,
300만 원 주고받는 피티 수업선생님에까지 거절당해야 하다니.



충격이 컸다. 내가 인생을 너무 내 맘대로 충동적으로 살았던 걸까? 이 나이까지 자기 객관화가 덜 되어서 자꾸 거절을 당하는 건가?


돈 쓰고도 거절당하는 내가.... 무능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자존감이 떨어져 있던 시기에 피티쌤의 거절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왜 맨날 거절당하고 슬픈 삶만 살아야 하는 거지?"



친구들한테 피티쌤 욕을 하기 시작했고, 친구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A: 야 원래 운동하는 애들이 다 기 잡으려고 너 운동 못한다고 가스라이팅 하는 거야 ^_^

B: 근데 너도 치즈케이크 보내면서 단백질 먹었다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ㅋㅋㅋㅋㅋㅋ

C: 딱 봐도 결과가 안 좋을 것 같아서 네가 컴플레인할 것 같으니까 선 그은 거지~ 똑똑한데?



친구들은 쌤을 욕해주다가도 나도 무모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어떤 나의 귀인이 이렇게 말해줬다.



"매일 아침에 뛰어봐. 그리고 너의 의지를 보여주면 선생님도 같이 열심히 해주지 않을까?"


바디프로필...찍고 싶어요 ㅠ


나의 의지를 증명해 보이라는 말이었다. 이건 마치 농구가 미친 듯이 하고 싶다는 '정대만', 혹은 <위플래시>에서 음악이 하고 싶다고 애원하는 주인공 '앤드류'일까? 제자가 너무 못해서 선생님이 그다음에 제자의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미션을 주는 것처럼. 마치 그런 극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300만 원이나 투자한 이별 극복기에서도 실패의 서사를 쓰고 싶지 않았다.

사랑도 실패했는데, 설마 피티도 실패한다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난 그 바로 다음날부터 매일 아침 러닝을 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수치스러웠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연속으로 거절당한 것이. 수능 시험 이후 뭔가 이렇게 간절히 원하게 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집에서 1km 거리에 뚝섬한강시민공원이 있었고, 집에서부터 뛰기 시작하면 정확히 1.1km 되는 지점에 바로 이런 뷰가 등장한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서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모자를 쓰고 운동복을 챙겨 입었다. 기분이 최악이어도, 너무 슬퍼도, 그래도 뛰면 오늘은 이 멋진 풍경을 보면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오전 7시 정도에 한강에 오면 사람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르신들이 많이 걷기 운동을 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부지런하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일찍 시작한다. 아침부터 새삼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처음에는 능력치가 되지 않아서 1km를 뛰는 것도 숨이 차오르고 힘들었다. 그러다가 일주일 차에는 2km를 뛸 수 있게 되었고, 나이키런 앱을 중지했다 다시 켰다 하면서 3km 정도 뛰고 걷는 것을 반복하면서 달리는 방법을 연습했다. 한 달 정도가 지난 후에는 드디어 나도 5km를 뛸 수 있게 되었다.



4월에 시작한 이후로 2022년에는 434km, 52시간 30분을 뛰었다.


피티쌤을 설득(?)하기 위해 4월부터 시작한 러닝은 이제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5월에는 주 4-5회 매일 오전 7시부터 한강을 뛰면서 그에게 나의 근성을 꾸준히 어필하게 되었고, 그 기간에 살도 꽤 많이 빠졌다.


5월에는 2-3km씩 뛰었고, 6시간을 뛰었다.



적어도 뛰는 시간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달리기를 하는 시간에는 이상하게도 더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다가도 헤어진 그와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그러다가 내가 바꿀 수 없는 실수의 순간들이 떠올라서 결국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미친 듯이 괴로워졌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무작정 뛰어버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땀을 흠뻑 흘릴 정도로 뛰고 나면 생각이 조금 정돈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던 것 같다.




첫 번째, 달리는 행위는 나 스스로를
더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달리기를 하면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또 죽지 않고 이렇게 움직이고 있구나! 이별을 해도 술 처먹으면서 감정을 낭비하지 않고 ^_ㅠ 나는 이렇게 긍정적인 행위를 하면서(!)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구나. 아주 기특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기안 84가 마라톤 풀코스를 도전하는 모습에 많이 공감했다. 하루 목표 km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걷지 않고 어떻게든 달리는 행위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다른 생각들은 떨쳐버린 것 같다. 일단 달리려는 목표에 모든 에너지를 쏟으면 신체적으로 힘들어져 잡생각이 사라진다. 



또 이렇게 좋은 풍경을 공짜로(!) 즐기면서, 출근 전 시간을 내서 달리기를 할 만큼 시간과 자원과 풍경이 주어진 것도 감사했다.


달리기는 오늘의 나와 이 상황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게 했다.



두 번째, 러닝은 합리적으로
울어도 괜찮은 시간이었다.




달리기를 할 때 긍정적인 감정이 들 때도 있지만,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이나, 내가 바꿀 수 없는 실수의 순간들이 떠올라 괴로울 때도 많았다.


그러면 그냥 울었다. 오전 7시 한강에는 사람이 거의 없거나, 어르신들 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울면서 뛰었다.


이건 인터넷 밈이기도 한데, 나에게 흐르는 게 눈물인지 땀인지 사람들도 나도 모른다.

눈물이 고여서 그렇게 울다가 계속 뜀박질을 하다 보면 땀이 눈 사이로 흘러서 눈물과 땀이 섞여버린다 (?)



침대에서 울면 궁상맞아 보이지만, 뛰면서 우는 건 합리화된다.



지금 흐르는 건 눈물이자 땀이니까....



그리고 당시 들었던 노래들도 참 좋았던 것 같다. 유튜브 트랙리스트의 활기차고 긍정적인 노래들은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할 만큼.. 도파민을 끌어올려준다.



아무튼 그렇게 5월의 나는 19번의 러닝을 하면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었고, 거의 매일 달렸던 나의 모습에 피티쌤도 마침내 내 바디프로필을 도와주기로 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정말 독하고 철두철미했던 나의 피티쌤...^_ㅜ)



그때 달리지 않았다면 아마 난 더 많은 눈물을 흘렸겠지. 그리고 어쩌면 어떤 모종의 이유로 인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달리기는 그렇게 여러 번 거절당했던 나를,
구원해 줬다.










이전 03화 카톡할 사람이 없어서 전 애인에게 연락하고 싶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