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가 보내는 주체적인 혼 생일 파티..
"대리님, 오늘 저희랑 돈가스 드시러 가실래요?"
돈가스는 나의 최애 음식이다. 그리고 회사 동료들도 내가 돈가스를 좋아하는 걸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이걸 거절할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 하나 있다.
"전.. 식단 중이라서요.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여성 동료들 사이에서 다이어트는 불가침 영역이다. 사실 회사 분들께는 이별을 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장기연애를 했기 때문에 헤어졌다는 고백을 하는 순간 엄청난 관심이 쏟아질 것이다. 헤어진 이유부터, 요새 심경 상태까지... 나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공적인 관계의 사람들에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지극히 사적인 질문들에 갖춰진 공적인 대답을 하는 것에도 이미 너무 지쳐있었다.
"남자친구랑 주말에 뭐 했어? 남자친구랑은 요새 뭐 하고 놀아?" 등의 일반적인 질문에 더 이상 일반적으로 답할 수 없는 것도 내가 불편한 상황을 피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힘든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긍정적인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건
성인들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또 다른 날은 생일이었는데, 바로 서른 살 생일에 이별로 인해 계획치 않게 혼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자친구가 없는 생일은 항상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이 된다. 20대 초반에는 가장 친한 친구나 고등학교 친구들을, 동기를 불러서 동네에서 맛있는 걸 먹고 카페에 가도 정말 충분했다. 20대 중반부터는 남자친구와 생일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미디어에서 보이는 선물들이나, 특별한 이벤트들은 30대의 생일은 '특별하게' 보내야 한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이번 생일은 어떠한 강박 관념으로 이벤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이번 이벤트는 '혼자' 말이다.
"선생님 저 바디프로필 8월 둘째 주에 찍어도 될까요?"
이미 중간에 허리를 다쳐서 피티 30회 차 마지막 날로 잡았던 바디 프로필 촬영일정을 한번 미룬 상태였다.
"회원님, 자주 미루시면 안 좋아요. 의지도 같이 미뤄질 수 있으니까요."
"네 맞아요 ㅠㅠ 근데 8월 그즈음에 찍으면 더 시기가 좋을 것 같아서요"
피티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2주 정도를 미뤄 생일이 있는 주에 일부러 이벤트를 만들었다. 그러면 내가 덜 외로울 것 같았다. 생일에 남자친구와 보내는 이벤트가 없다고 징징거리지도 않으면서 운동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혼자 점심을 먹어도 괜찮고, 혼자 생일을 보내도 괜찮을 만큼. 마음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근육을 키워서 단단해지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한 30대의 생일은 어떠한 최악의 상황이 발생해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나는 ENTP의 에너지에 비해서 유독 체력이 좋지 않았다. 항상 피곤해했고, 피곤은 곧 짜증으로 이어졌다. 20대의 나는 자주 기뻐하고 즐거워했으나, 쉽게 지치고, 슬퍼하고, 쉽게 화를 냈다. 소중한 사람에게 내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냈던 이유는 그만큼 내가 체력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이별의 이유를 성찰한 결과다.
아무튼 나는 나에게 셀프 생일 선물로 근육 증진(?)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생일'이라는 이벤트를 기점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고백하자면 난 그때 나에게 정말 많은 돈을 썼다. 나 스스로를 아껴준다는 명분 하에 내가 쓰고 먹는 것들을 모두 좋은 것들로만 했던 것 같다.
사실 운동이 나가기 싫었던 날들이 재밌던 날보다 더 많았다. 사실 헬스라는 운동이 그렇게 재밌는 운동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혼자서 해야 하는 운동이고, 반복되는 동작을 해야 하고 어떻게 보면 기구를 사용하며 무게를 올린다는 것은 곧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제시믹스와 나이키 VIP 고객이 되었다. 당시 30여 벌의 운동복과 수십 개의 모자를 구매했다. 7일 동안 운동에 나가려면 각 운동 아이템이 7개는 넘어야 한다..!!!! 는 원칙은 카드 부채를 늘려갔고 회사 출근복보다 운동복에 쓰는 돈이 많아졌다. 매일 운동을 가려면 패션이 달라 보여야 하고, 예쁜 옷을 입으면 그 날 운동이 더 잘 되니까~ ^_^
또한 식단을 하느라 단 것을 먹지 못해서 단백질 바에 미친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더단백, 셀렉스, 포스트, 프로틴방앗간 등 국내 프로틴바의 성분이 별로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 영국의 마이프로틴, 미국의 컬크랜드, 퀘스트 바, 베어벨스 등 전 세계의 단백질바들을 직구해서 20종 이상 모두 비교해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소비는 근육 증진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200% 합리화되었다
당시는 근육 증진에 대한 정당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의 허전함을 어떻게든 물질로라도 채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혼자여도 괜찮은 날을 보내기 위해서 내 안에서는 혼자가 되어도 괜찮은 조건들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고, 나는 누군가 나를 축하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나를 대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방법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아껴주지 않고 슬퍼하도록 방치했던 시간들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혼자가 된다는 의미는 나의 시간을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의미 없이 사람들과 점심을 먹지 않아도 괜찮았고, 나가기 싫은 저녁 약속에 가지 않고 혼자 운동을 하고 샐러드를 먹는 삶이 만족스럽고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사람들의 제안을
'잘' 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무조건 OK 하는 성격이 있어서, 그동안 무리하게 시간과 체력을 쓴 적도 많았다. 식단과 운동을 한다는 아주 건전한 핑계들은 좋은 거절 사유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나고, 내가 먹어야 할 음식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전 연애에서도 내가 적절하게 거절하지 못해서 나중에 화가 쌓였던 부분들도 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더 이상 나를 거절하는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나를 좋아해 주고 아껴주고 나를 소중하고 긍정적으로 여겨주는 사람을 찾게 되었다. 이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려고 했다면 당시에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게 내 마음이 편하고, 슬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혼자 있는 시간에 나를 찾아와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너는 예쁜 사람이니까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먹어야지"
바디프로필 촬영 당일 날, 결론적으로 나의 신체적인 근육은 2kg 정도 늘어있었고, 스스로 준비한 생일 케이크를 먹으면서 활짝 웃는 ^0^ 생일 컨셉을 성공적으로 소화했다.
촬영 막바지에는 배고프고 물도 못 마셔서 정말 정말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촬영하는 순간은 정말 즐겁고 뿌듯하고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15만 원짜리 출장 메이크업을 받고 이태원에 놀러 가는 호사도(?) 누렸다. 만족스러운 셀프 이벤트였다.
솔로로 보낸 생일이 외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생일을 축하하는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방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