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따뜻함
"잘 지내세요?"
금요일 3시, 점심을 먹고 퇴근을 기다리던 무료한 오후 어느 날. pc카톡 알림으로 낯선 남자에게 선톡이 왔다. 카톡 알림창으로 빠르게 시선이 갔고, 고요하던 내 심장은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맞았다. 순간 내 심장에 정적이 흘렀다.
나에게 남자가 먼저 선톡이 오다니!?!!! 이게 뭔 일이람?!?!!
몇 개월 전 원데이 러닝 클래스에서 만나 한 번 커피를 마셨던 남성이었다. 나이가 나보다 꽤 많았고 사람은 착해 보였으나 커피를 마시고는, 연락이 따로 오지 않았다. 그냥 내가 궁금했었나 보네- 하고 끝난 사람이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친구한테 바로 카톡을 때렸다.
[나] "예전에 그 게임회사 다니는 사람 카톡 왔어!“
[친구] "아직 여자친구 없어서 언니한테 연락한 것 같은뎅?ㅋㅋㅋ 한번 만나봐"
[나] "에이 벌써 8개월이나 지났는데? 그럼 왜 그때 바로 연락 안했는뎅ㅎㅎ"
[친구] "딴 애랑 썸 타다가 잘 안되고 언니 생각났나 보지ㅋㅋㅋ 일단 만나보자"
사람은 사람으로 잊으라고 했던가. 장기 연애 이별 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이전 연애의 흔적은 내가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마지막 연애의 시작은 20대였으나,
이별하고 보니 나는 30대가 되어 있었다.
한 사람에게 익숙해진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정말 오랜만의 설렘이었다. 5년의 장기 연애 동안 다른 남자와의 연락은 거의 돌보듯이 금기시되어 왔고, 학교 동기오빠나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이던 나의 유일한 남사친, 가족이 아니라면 개인 톡을 할 일이 없었다.
정말 오랜만의 플러팅(?)이라서 안부 인사 하나에도 심장이 콩닥거렸다. 대화 자체가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틀 동안 고민 끝에 일요일 오후에 답장을 했다.
[나]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나요!"
[남성] "네 저는 잘 지냈어요. 내일 뭐 하시나요?!"
새로운 남자와 데이트를 해본지도 정말 오랜만이라서 무슨 옷을 입을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러웠다.
반면에 차일까 봐 "그래 그냥 밥 한 끼 먹는 거야"라는 마법의 주문을 몇 번이나 되뇌면서 내가 까이는 경우의 마음의 쿠션을 충분히 만들기도 했다.
난 차일 수도 있고 거절당할 수도 있지만 긴장될 때 웃는 게 일류니까!!! 일단 웃는다!!! (속마음)
당시 피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칼로리가 적은 회와 사시미를 먹을 수 있는 이자카야에서 그를 만났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퇴근이 늦어져서 7시 반쯤 온 그분은 판교의 개발자처럼 편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첫 느낌은 훈훈해 보였다. 당시 아직 쌀쌀한 초봄이었는데 가죽재킷에 반팔티를 입고 한껏 멋을 부리고 오셨다.
"뭐야 왜케 꾸미고 왔어......?" (속마음)
오랜만에 옷을 예쁘게 입은 남성과의 데이트는 날 떨리게 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렴풋이 당시 공기와 그 사람의 눈빛과 같은 분위기는 기억이 난다.
나를 원하는듯한 눈빛. 잘 보이고 싶어서 자신의 즐거운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날 재밌게 해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근황을 많이 말하고 농담을 던져줬다.
5년 연애의 끝물에는 볼 수 없었던 다정하고 간절한 눈빛이었다.
덕분에 오랜만이 많이 웃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이렇게나 많이 걸어주면서, 관심을 표현했던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묘하게 안도감을 주면서 편안함까지 주었다.
"저희 다음에 또 볼 수 있겠죠?"
"제가 피티를 받는 중이라 식단 때문에 먹는 게 좀 제한적인데 괜찮으시겠어요?ㅎㅎㅎ"
"그럼요. 이 참에 저도 같이 식단 하면 되죠. 올해 저도 다이어트가 목표였는데 잘됐어요."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서, 놀랍게도 우리는 정말로 샐러드를 먹었다.
소고기와 고급스러운 풀이 나오는 피그인 더가든에서 스테이크 샐러드와 파니니를 시켰다. 애프터에는 파스타가 국룰인데, 샐러드를 먹어주다니. 이 남자, 정말 샐러드를 좋아하는 초식남인가?
"역시 비싼 샐러드는 맛있구나.
덕분에 처음 알았네요."
처음에 그 남자가 샐러드를 너무나도 맛있게 먹어서 '남자가 샐러드를 좋아할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직접 본인이 샐러드 집을 찾아와 함께 새로운 샐러드 가게 탐방을 가기도 했고, 종류를 다양화해서 포케나 샐러드 파스타를 먹기도 했다.
외식으로 샐러드를 같이 먹어주는 남자 덕분에 샐러드는 식단이 아니라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일명 '남만샐', 남이 만들어준 샐러드는 정말 맛있고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단지, 비쌀 뿐이다.
그렇게 나는 샐러드를 같이 먹어주는 남자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내가 원하는 걸 같이 해주는 사람이었다. 식단을 한다고 하면 같이 식단을 같이 해주고, 유산소가 하기 싫다고 말하면 같이 러닝을 해줬다.
내가 식단을 한다는 이유로 나를 혼자두지 않았고, 치킨을 못 먹는다고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도록 함께 도와주었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갔다.
부담스럽게 '사귀자'는 통상적인 말
한 마디도 없이,
그렇게 그는 나의 시간에 점점 스며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외적으로나, 수치적으로나 건강해졌고 6개월 동안 체지방률도 11% 이상 감소했다. (물론 우리 피티쌤 덕도 정말 컸지만... ^_ㅠ 외식으로 샐러드를 먹을 수 있었던 게 컸다)
그분은 살이 빠지지는 않았는데, 그 남자가 샐러드를 먹고 집에 가서 김치찌개를 시켜 먹었다는 것은 정말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ㅠㅠ
"왜 저한테 8개월 만에 연락 주셨어요?"
왜 그가 오랜만에 연락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거절이 두려워 시도하는 게 어려운 나이에 그 분은 정말 큰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그냥 프사를 보고 재밌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잘 지내는지 궁금하더라구요.“
당시 나의 프사는 롯데월드에서 나이에 맞지 않는 머리띠를 쓰고 신나게 놀던 사진이었다. 나는 그래도 꽤 유쾌한 사람이었고 그걸 좋게 봐준 것 같다.
그 분은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시고, 살아온 환경도, 분야도 전혀 달랐다. 비슷한 사람과만 연애하던 편견 덩어리였던 20대의 나는 절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종류의 남성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분은 내가 이별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별 후 서러움과 배신감에 지쳐있던 나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준 그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배려해주며, 나와의 시간을 기분 좋은 일들로 채워주는 것도 고마웠다.
지친 마음을 달래주던 그 따뜻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전 남자친구가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 분과의 만남은 내가 "나도 다른 사람도 만날 수 있구나" 하는 작은 희망과 가능성을 주었던 것 같다.
어느 추운 날이었다. 그 남자를 역에서 만나기로 한 날. 뭔가를 열심히 흔들면서 걸어 오고 있었다.
"저번에 추위 많이 타시는 것 같아서 핫 팻 몇 개 사 왔어요. 다 떨어지면 또 사드릴 테니까 많이 터뜨리세요 ㅎㅎㅎㅎㅎ“
수족냉증이 있던 나를 관찰해 주는 남자. 따뜻한 핫팩처럼 온기를 줬던 사람. 그리고 내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줬던 든든한 조력자.
이별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새로운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