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문이다
매 시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환승연애> 시즌3이 방영을 시작하면서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다. 솔직히 시즌 2 방영 시기에 나의 실제 환승+이별 시기라서 집중해서 보기가 좀 힘들었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출연자들이 꼭 나같아서 마음이 아팠다고 해야 할까.
20대와 30대의 시기를 지나가면서 나는 몇 차례의 이직과 환승 연애를 경험했다. 사회생활 6년 차와 연애 5년 차는 어쩌면 비슷한 의미에서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부터 중견기업, 스타트업까지 10여 개 회사이 면접을 보면서 그 과정이 연인을 구하기 위한 소개팅과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물론 <나는 Solo>를 보면 아무리 좋은 직장을 가진 분들도 연애에 어려움을 겪고, 좋은 회사를 다니지 못하더라도 결혼을 잘하는 경우도 많으니 어떠한 정확한 상관관계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연관 관계는 존재한다.
그래서 이별의 경험이 이직에 도움이 되는가? 그것은 후반부에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다음은 내가 발견한 몇 가지 공통점이다.
생각해 보면 초년생 때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어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는 기분을 느끼면 쉽게 옮겼다. 정규직으로 일한 첫 회사는 중견기업이었는데, 첫 연봉과 네임밸류는 나쁘지 않았으나 업무적으로 불법적인 일을 시킬 때가 있었다. 물론 회사 대표가 전과자(?) 출신이라서 매출을 위해서라면 부당한 업무도 해야 한다는 기조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어리고 그 회사를 다닌 기간도 1년 미만이어서 쉽게 회사를 '그만둘 결심'을 했고, 몇 군데의 대기업 공고를 넣다가 정규직 전환형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20대에 사귀었던 남자친구들과도 "나랑 안 맞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쉽게 이별을 고했다. 그때는 힘들어도 미래가 밝았고, 기회도 많았다. 남자친구가 없어도 전혀 두렵거나 이상하지 않았다.
2-3년 차 정도된 장기연애를 하게 되면 떠날 '용기'가 필요하다. 2-3년 정도 관계를 함께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잘 맞았다는 것이고, 나도 이 사람에게 익숙해졌다는 의미다. 4년 정도를 다녔던 회사는 직무 때문에 2년 차부터 이직하고 싶었으나, 장점이 꽤 많았던 IT 스타트업이라서 상장을 기다렸다. 이미 인수가 되기도 했고, 동료들도 좋아서 나머지 1-2년은 다니면서 환승 이직을 꿈꿨다. 이때 신입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를 찾아봤던 것 같다. 잡코리아, 사람인, 잡플래닛, 링크드인, 본사 홈페이지 등 지원루트도 다양했고, 해드헌팅이나 지인 추천으로 본 면접도 다양했다.
면접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지금 회사도 충분히 다닐만하니까" 이런 생각으로 나머지 1-2년의 시간이 그냥 흘러가버렸다.
5년 차 연애도 비슷했다. 권태기라고 불리는 2-3년 차에 첫 번째 이별을 하게 됐고, 그 기간 동안 소개팅을 9번 정도 했다. 다양한 루트로 소개가 들어왔고, 사람들의 외모나 직업군도 나쁘지 않았다. 데이트 앱에 프로필을 올린 적도 있었는데, 돈 버는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좋아요가 많이 눌렸다. 그렇게 환승연애를 하고, 또 다른 이별과 재결합 등을 하고 보니 30대가 되어있었다. 사실 재결합 이후에도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보였지만 헤어지기 힘들었다. "나와 이 정도로 잘 맞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커져서 이별하지 못한 것이 컸다.
경력이 쌓이고 연차가 높을수록 한 번의 움직임이 쉽지 않다. 이미 업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가지고 있고, 자칫 가벼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난 이미 그 사람과 잘 맞지 않음을 직감하고 있었으나, 이별을 말하는 건 내가 먼저 하고 싶지 않았다. 결정에 책임을 지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큰 숙제가 되어버렸다.
5년 차가 되고 나서 이제 정말 "이 회사를 못 다니겠다"는 결심이 섰다. 이전에는 '완벽한 회사가 아니면 절대 옮기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커서 연봉, 복지, 업계, 직무, 사람, 규모, 네임밸류.. 등 모든 면에서 괜찮은 회사를 찾았다. 회사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고, 면접에 임하는 태도도 간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5년 차가 되던 시기에 이제 이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게 나에게 해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단 1개라도 더 좋으면 옮기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로 이직처를 구할 때는 '직무 전환'과 '규모'만 생각하기로 했다. 당시 운영보다는 기획 요소가 더 많은 직무가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내가 업무시간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규모'는 곧 회사의 안정성을 의미했기 때문에 캐시카우가 있는 중견-대기업에서 벤처사업을 하는 팀으로 옮기게 되었다. 대신 직장의 분위기나 업계를 옮기겠다는 욕심은 포기하게 되었다. 지금 회사에 100%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보다 나은 점이 2개나 더 있기 때문에 만족한다.
환승연애 당시에도 이미 이전 연애에서 이별의 고통을 맛봤기 때문에 "더 이상 울지만 않으면 된다"는 심정이 컸다. 사실 새롭게 만나게 된 분은 이전분과 비교한다면 나이도 더 많고, 소위 말하는 집안이나 학력 등의 스펙은 더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전 연애에서 하도 많이 울었기 때문에 '나를 울리지 않을 것 같은 따뜻함'이 1순위로 다가왔다.
친구들이 "너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있겠어? 너랑 안 맞는 사람이야"라고 만남을 만류했을 때도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무한하게 다정한 사람이다. 하나라도 더 나았기 때문에 나는 환승을 한다." 그리고 그 연애의 만족도는 이전의 최악의 경험을 상쇄시켜 줬기 때문에, 나는 상대적으로 행복했다. 역시 인생은 비교군이 생기면 더 행복하고, 만족감이 높아지는걸까.
"너 받아주는 곳이 있대? 나이도 있는데 갈 곳을 정하고 퇴사해."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 부모님이 내게 하신 말-
5년 차의 회사, 5년을 사귄 남자친구와의 이별에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내가 갈 곳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 혹은 지금보다 더 낮은 조건으로 일하게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경력이 쌓일수록 이 두려움은 더 커져만 갔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다른 곳에 적응한 내가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직을 해도, 남자 친구가 바뀌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까.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던 나의 본질은 장소가 바뀌었다고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나를 더 잘 알게 되었고, 현재의 삶이 더 만족스럽다. 내가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을 극복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안정성이나, 정년 보장보다는 나는 내가 원하는 환경에서 성장가능성이 높은 직무로 일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게 내가 더 의욕적으로 일하게 만들었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돈 많은 남자 만나야 해", "전문직 만나야지 안정적이야", "공무원이나 공기업 남성이랑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모든 첨언들을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 나는 나의 취향을 더 잘 파악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꼭 엄청난 벤츠(?)를 만난다는 보장은 없다. 단지 나와 더 잘 맞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커진다.
아니 오히려, 내가 '잘 맞추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별을 통해서 최악의 감정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옆에서 그냥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순간들이 있다. 그런 고마운 순간들을 통해서 그 사람의 장점을 더 많이 보고 단점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인드와 태도가 장착된 것 같다.
이직과, 몇 번의 이별과 새로운 만남을 반복하면서 내가 조금 더 내력이 강해지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버린걸까. 아니면 안되는 건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된걸까.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별은 이직에 도움이 되고, 이직은 이별에 도움이 된다. 박찬욱 감독은 <설국 열차> 봉준호 감독을 대리한 수상 소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설국열차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송강호 씨가 '너무 오랫동안 닫혀있어서 벽인 줄 아는데, 사실은 문이다.'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분께서도 벽인 줄 알고 있던 여러분 만의 문을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회사는 다 똑같다',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말은 결국 '내가 변해서 모든 것을 감당할 내력이 생겼다'는 의미일지도. 닫힌 문을 열고 나가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