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고 싶다. 먹고, 싸고, 잠자는 생존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인생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환풍기 소리가 낭낭하게 울리는 5평짜리 원룸에서 찬희를 기억하려 노력한다.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 잠시 잊고 있었던 찬희. 해외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을 찬희. 대학생활 내내 가까이 가고 싶었으나 의지의 부재로 멀어진 찬희.
찬희는 어려웠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까지. 연애를 안 해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독 찬희에게만 말을 거는 것부터 어려웠다. 찬희 앞에서 나는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투정을 부리는 어린 아이와 같았다. 찬희의 눈을 못 마주치고 찬희가 다가와도 멀리 떨어져 경계하곤 하였다. 이런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찬희는 곧 나에게서 멀어져 갔고 나는 찬희를 잊은 척 나 자신을 속이고 대학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곧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1년간 가족과 친구 몇 명 이외에 아무와도 대화를 하지 않으며 홀로 지내면서 드디어 내면을 들여다 본 것이다.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 중학생부터 속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나 이를 애써 무시한 나의 자아. 난 여자와 남자를 좋아한다. 둘 중에 선택하라 하면 선택하라고 한 사람을 없앨 것이다. 어느 사람들과 달리 나는 내 정체성을 흔쾌하게 드러내었고 다행히 내 지인들도 이를 꽤 잘 수용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내 비겁함이 숨어있다. 내 정체성을 수용할 만큼의 사고적 유연성을 가진 사람들을 고른 것이다. 여기에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내 부모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서로 절대 양보 못할 문제에 대해 싸울 바에 아예 논의를 하지 않는 편이 서로의 정신 건강에 더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 정체성을 인정하였을 때 쯤 찬희가 생각났다. 찬희는 무얼 하고 있을까. 나는 기억할까. 이런 신파적인 생각을 하며 나날을 지내던 중 어느날 용기를 내어 찬희에게 연락을 하였다.
“찬희야, 잘 지내지? 나 진이야. 연락 안 해서 미안해. 우리 같이 밥이나 먹을래?”
고맙게도 찬희는 카톡 메시지에 바로 답해주고 우리는 약속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