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시선으로부터,> & 김초엽 <관내분실>
<시선으로부터,>는 출판사 서평에서 "시대의 폭력과 억압 앞에서 순종하지 않았던 심시선과 그에게서 모계로 이어지는 여성 중심의 삼대 이야기"라고 소개된다. '부당하고 폭력적인 시대에 강인하게 살아가는 여성 삼대의 삶'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심시선과 두 딸, 손녀들로 이어지는...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여성들의 모습들도 충분히 공감되었지만 책을 읽으며 내 마음에 선명하게 남은 또 다른 키워드는 '누군가에 대해 추억하는 방식'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시간의 조각을 공유했던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기억해줄지, 그 시간을 추억으로 포장해서 담아줄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시선으로부터,>를 읽으면서… ‘누군가와 함께 했던 순간을 추억(追憶)하는 것’에 대해 다시금 곱씹게 되었다.
전쟁 후 가족들이 몰살되고 ‘사진 신부’로 위장해 하와이로 건너갔던 심시선 여사는
미술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독일 화가의 유혹에 이끌려 독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괴팍한 화가의 폭력과 광기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모진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아픔과 상처들이 옹골찬 속살로 다져져 귀국 후에는 당당하고 멋진 화가이자 작가, 강연자로 활약한다. 그런 심시선 여사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족들이 10주년 기일에 시선의 젊은 한때 삶의 배경이었던 하와이에서 특별한 제사상을 차리는 것이 이 소설의 얼개다.
평소 제사 문화를 반대했던 시선의 뜻을 따라 따로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떠난 지 10년째 되는 해, 시선과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장녀 명혜의 제안에 따라 온 가족이 하와이로 떠난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시선으로부터,>, p.83, 정세랑
심시선 여사가 한때 머물렀던 하와이에서 가족들 각자가 마주한 기쁨의 순간을 수집해 제사상에 올리자는 제안… 참 기발하고 흥미롭다.
세상에 없는 가족, 지인을 추억하는 방식에 따로 정해진 공식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시선의 자손들은 의미 있는 제물을 찾기 위해 각자 끌리는 대로 하와이를 느껴보는데,
그 과정에서 각자의 마음 속 고민들과 생채기들을 치유하며 희망을 키워내기도 한다.
딱 맛있게 따끈한 말라사다 도너츠, 바로 구운 팬케이크, 훌라춤, 레이 목걸이, 레후아꽃과 화산석 자갈, 새 깃털, 처음 서핑에 도전해 채집한 파도 거품, 무지개 사진, 커피 등등……
가족들이 심시선 여사를 추억하며 수집한 제물은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제각각이었다.
이토록 신박하고 따뜻한 제사상이 있을까 싶다.
서로 다른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 둘 꺼내어 맞춰보며
지금은 세상에 없는 한 사람에 대한 추억몰이를 하는 가족들의 대화를 몇 번이나 되새기며 읽었다.
“엄마 이제 안 울어?” 해림이 물었다. “응, 안 울어. 얼른 다시 사러 갔어.” “왜 그런 걸로 울었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 사람이 죽고 없어도. 우윤은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건조한 답을 택했다. “속상하면 울 수도 있지.”
<시선으로부터,>, p.296, 정세랑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시선으로부터,>, p.331, 정세랑
심시선 여사처럼 생전의 강렬한 영향력과 흔적들로 추억거리가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매몰되거나 끊겨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김초엽 작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관내 분실’에는
생전에 우울증에 시달리며 가족들과 감정의 골이 깊이 패이고,
사후에도 가족들에게 기억의 연결고리가 남아있지 않은 한 엄마의 이야기가 나온다.
미래의 어느 시점일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사람들의 생애 정보를 데이터로 이식해
‘마인드’를 도서관에 저장하는 시대가 이야기의 배경이다.
사람들은 도서관을 찾아 망자의 영혼과 만나거나 추모할 수 있다.
산후우울증과 사라지는 존재감에 절망하며 스스로를 가두었던 엄마…
그런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주인공 지민은 임신을 하면서 마인드 도서관을 찾았지만
쓸쓸히 죽어간 엄마의 마인드가 관내분실 상태임을 알게 된다.
도서관 내에 남아 있지만 데이터에 접속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도서관 어딘가에 잠복되어 있는 마인드를 검색하려면 기억과 강력하게 얽혀 있는 유품이 필요하다는 사서의 말에, 엄마의 흔적을 하나씩 되짚어보는데……
가족들에게조차 묻혀버린 엄마의 기억을 어렵사리 좇으면서
지민은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지 못한 엄마의 마음을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흔히 애증이 얽힌 사이로 표현된다. 딸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삶을 재현하기를 거부하는 딸.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앓는 딸과 딸에 대한 애정을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하는 엄마. 여성으로 사는 삶을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다른 세대를 살아야 하는 모녀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는 없는 묘한 감정이 있다. 대개는 그렇다. 한때는, 지민도 엄마와 자신 사이에 그런 애착과 복잡한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수 없다면>---‘관내분실’ 中, p. 201
“그래도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마인드들은 우리가 생전에 맺었던 관계들, 우리가 공유했던 것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뇌에 남기는 흔적들과 세상에 남기는 흔적들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억한다는 것이죠. 마인드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영원히 미해결로 남는다고 해도, 우리는 마인드를 통해 그들의 삶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수 없다면>---‘관내분실’ 中, p. 216
“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면, 표지 안쪽, 아니면 페이지의 가장 뒤쪽 작은 글씨, 그도 아니면 파일의 만든 사람 서명으로만 남는 작은 존재감으로라도.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수 없다면>---‘관내분실’ 中, p. 223
김이나 님은 <보통의 언어들>에서 ‘추억’이라는 단어에 대해 ‘기억’에 나의 감정이 적극 개입된 결과라고 정의했다.
좋은 감정을 덧입은 기억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르는 것 같다.
과연 나는 누군가의 추억 속에 잠시나마 머물러가는 삶을 살아왔는지 돌아보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