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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May 22. 2024

나의 40대도 무르익어가는 중...

정여울 <마흔에 관하여> & 임경선/요조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작년부터 새치가 부쩍 늘었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몸이 알려준다.

어디서 들은 노래 가사를 얹어 “엄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고 있는 중인 거야”라는 또리의 토닥거림에 피식 웃어보지만 이젠 정말 나도 40대 중간 어딘 가에 서 있다.

아득바득 치열하게 달려오진 않았어도 내가 선택한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오던 참이었다.

‘중국어 번역’에 대한 애정과 경력들을 차곡차곡 쌓고, 그 안에서 강의와 연구로 영역을 확장했다.

그 사이 내가 꿈꾸던 모습들이 서서히 구체화되어 가고 있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한 켠에 붙박여 있는 느낌이다.

과도한 ‘신중함’을 넘어서는 각종 우유부단함과 결정 장애로 그동안 놓쳐온 것들은 없는지

하나에 꽂히면 올인하는 성격이 정작 내 삶을 너무나 단조롭게 만든 것은 아닌지

본캐에 충실하기도 바빴던 시간들이라 다양한 부캐의 반전매력을 선보이는 이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물론 지금의 내 모습도 충분히 대견하다.

다만 40대 중반의 어느 순간, 지난 발자취들을 돌아볼 때마다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최근 읽은 <마흔에 관하여: 비로소 가능한 그 모든 시작들>(정여울 저)과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 문학동네)는 흔들리는 요즘 내 마음에 착착 감기는 문장들로 가득했다.


‘나이듦’에 대해…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를 껴안는 방법들’에 대해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마흔에 관하여>는 ‘지나간 무늬를 헤아리며 아름다운 자기 발견을 하는 시기가 마흔’이라며 힘을 실어주고, 단조롭게 고여가던 나의 의지를 찰랑찰랑 흔들었다.



“마흔은 내가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나이다. 30대까지만 해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만 있었지 진심으로 꾸밈없이 나를 보듬지 못했다. 마흔 이후 나는 내 ‘그림자’를 완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게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콤플렉스와 트라우마가 있음을, 하지만 그 그림자조차 나의 어엿한 일부이며 내가 사랑하고 돌봐야 할 나 자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마흔은 ‘내 그림자와의 행복한 동거’로 힘차게 시작되었다. (…)이제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젊음이 내게 가져다준 것들’을 조용히 곱씹으며 지나간 시간의 무늬를 헤아려보는 시기, 그런 아름다운 자기 발견의 시간이 바로 마흔이다.”



<마흔에 관하여: 비로소 가능한 그 모든 시작들> p.9 (정여울 저), 한겨레 출판   






특히 아래 문장에서 뜨끔했는데, ‘조심’과 ‘도전’ 사이에서 늘 도전의 용기를 저버렸던 내 모습이 소환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도전하라는 속삭임 앞에서 ‘신중해야 하니까’, ‘아직 준비가 안 돼서’ 등등을 구실 삼아 용기내지 못했던 것들이 내면 한 켠에 자리한 갈증과 허무함의 근원일지도 모르겠다.




“왜 그토록 ‘조심하라’는 주변의 잔소리에 움츠러들었던 것일까, ‘도전하라’는 말에 피가 끓기보다는 ‘조심하라’는 말에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던 모든 순간들이 몸서리치게 안타까웠다. 영웅적이거나 폭발적인 용기는 낼 수 없을지라도, 내 삶을 스스로 꾸려가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며 내가 믿는 가치를 지켜낼 용기 정도는 꿋꿋이 지닌 채 살고 싶었다. 그 최소한의 용기 있는 삶을 위해서라도 ‘조심하라’는 무의식의 습관과는 단호한 작별이 필요하다. 

이제는 ‘조심하라’는 마음속 빨간불과 ‘도전하라’는 마음속 파란불이 싸울 때마다. ‘도전하라’는 속삭임에 더 날카롭게 귀 기울인다. 조심은 이미 몸과 마음에 깊숙이 배어 있지만, 도전은 반드시 새롭게 끌어올려야 할 용기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마흔에 관하여: 비로소 가능한 그 모든 시작들> p.195 (정여울 저), 한겨레 출판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팬이기도 한 요조, 임경선 두 저자의 교환일기 형태다. 




두 사람의 대화를 실제로 듣고 있기라도 하는 것 마냥 열심히 맞장구 치며 읽었다. 

서로의 마음을 교환하고 채워줄 수 있는 우정이 부럽다는 생각도 하면서… 

(문득 남편과 연애하면서 잠깐 주고받았던 교환일기가 떠오른다. 풋풋한 설렘을 노트에 꾹꾹 눌러 담아 서로에게 전했던…서재 어딘 가에 빛 바랜 채 누워있을 텐데)


이 책에서도 40대는 ‘내 안의 상처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시점’, ‘자신의 핵심 가치를 추려 그것을 단단한 베이스로 두고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를 모색해 보는 시기’라고 제안한다. 









"우선 40대가 되면 대개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해져(아니 정확히는 가능해야만 해!!!). 극적인 변화나 기적은 사실상 일어나기 거의 불가능하거든. 속된 말로 자기 싹수를 자기도 아는 거야. 그러니 자기와 상황이 너무 다른 남들과 나를 비교하거나 질투하는 건 40대로선 해서는 안 되는 짓이야. 또한 이때는 여태까지 아무리 노력해도 치유하지 못한 내 안의 상처를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이기도 해. 즉 오랜 상처를 그냥 나의 일부로서 가지고 살자고 결기 있게, 밝게 체념할 줄 알아야 해. 놓아줄 건 놓아주고, 보내줄 건 보내주고, 훌훌 털 거 다 털어버려야 하는 시기야. 아무튼 이런 내면의 대청소를 마친 상태에서 그렇다면 ‘앞으로의 내 인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돈해야겠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이 나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주는지, 어떤 사람들을 가까이에 둘지, 대충 이맘때면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봐. 인생살이의 기본 방향성에 대한 방황은 더 이상 질질 끌지 말고 아무리 늦어도 30대에선 끝내야 하지 않겠니?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심플하게 추린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지나치게 고집하느라 시야가 좁아지는 건 조심해야 할 것 같아… 40대가 되어 자신의 핵심 가치를 추리면 그것을 단단한 베이스로 두고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를 모색해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돼.”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p. 205, 207 –사십대,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 문학동네





“博观而约取, 厚积而薄发(두루 보되 요점을 취하며, 두텁게 쌓되 천천히 풀어내라, 出自苏轼《稼说送张琥》”는 말을 좋아한다. 

얄팍한 허세로 한껏 치장하기 보다는 내면이 꽉 차서 자연스럽게 빛을 뿜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태까지 공들여 포개어 담아온 내 삶과 일을 사랑하고, 

부족한 나까지 끌어안으며 나만의 속도로 차분하게 앞으로 더 나아가야겠다.  

새로운 배움을 지속하고, 도전의 용기도 조금씩 얹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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