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천 개의 파랑> 소설 &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시간이 흘러 보경은 그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간은 그곳에서 1초도 흐르지 않았다. 보경이 매일 일찍 일어나 쉬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달리기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정적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수면 위에 돛을 펼치고 있었다.
“왜요?” 콜리가 물었다.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시간은 고여 있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가도 여지없이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슬품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천 개의 파랑> p.285, 콜리와 보경의 대화)
콜리가 지냈던 그 집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고요했다. 세 명이서 사는 집이었지만 각 시간대별로 1인분의 소음만 발생하는 곳이었다. 함께 있지만 맞물리지 않는 각자의 시간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콜리는 그 침묵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금씩 균열이 생기며 서로에게 스며든 소움이 서로의 시간을 맞춰줄 거였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말이다.(<천 개의 파랑> p.346, 콜리가 바라본 연재 가족)
연재는 무언가에 열중할 때 빛나는 인간이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빛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열을 감지할 수 있는 콜리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연재는 콜리의 몸을 수리할 때 자주 빛을 뿜었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열중하며 콜리의 다리를 만지던 순간과 그릇에 담아 온 씨리얼을 퍼먹으며 어느 부분이 잘못 연결되어 있는지 도면을 살펴볼 때에도 빛이 나왔다. 지금도 연재의 몸에서는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천 개의 파랑> p.300)
투데이는 달릴 때 행복한 아이다. 태어나서 줄곧 주로를 달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 말은 결국 달림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 동안 마방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관절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주로를 달리는 것이 투데이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천 개의 파랑> p.308)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천 개의 파랑> p.347)
"괜찮아요. 신경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천 개의 파랑> p.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