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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May 27. 2024

조금 천천히 가는 연습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소설 &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처음 전자책으로 무심코 열었다가 그대로 주저앉아 끝까지 읽고

지면에 얹어진 활자를 곱씹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싶어 종이책을 사서 또 읽고

최근에 나온 뮤지컬 버전을 보다가 무대에서 입체화된 서사에 또다시 마음이 들썩였던 소설이다.

(근 몇 년간 읽었던 작품 중 추천작 베스트 3를 꼽으라면 단연코 그 중 하나다)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는 연구원의 실수로 학습칩이 삽입되어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는 독특한 로봇이다.

자신을 싣고 달리는 말 '투데이'와 교감하려 하는 '콜리'

어느 순간 주마를 달리던 '투데이'가 더이상 행복해하지 않는 것을 느낀다.

쉼없는 달림으로 지쳐가는 '투데이'를 지켜주기 위해 '콜리'는 스스로 낙마하는 선택을 한다.

몸체가 부서진 '콜리'는 폐기 처분될 예정이었지만 '연재'의 도움으로 구출되고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지낸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2035년은 인간과 휴머노이드 로봇이 공생하고 있지만 기술의 수혜가 약자들에게까지는 미처 미치지 못하는 세상이다. 또한 로봇이든 기술이든 동물이든 구식이 되고 효용가치를 다하면 너무나 쉽게 대체되고 유기된다.  


'연재'의 엄마 보경은 소방관이었던 남편을 잃고 홀로 경마장 근처 식당을 운영하며 두 딸을 키우고 있다.

(소방관은 화재 현장에서 3%의 가능성을 놓지 않고 보경을 극적으로 구하고 그녀와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결국 80%의 생존 가능성이 있다는 화재에 투입되었다가 낡은 소방복 때문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연재'의 언니 '은혜'는 어릴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지만 사이보그 다리 삽입 수술을 할 여력이 되지 않아 휠체어에 의지해야 한다. 경주마 '투데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각별하고 소중하다.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을 남들처럼만 대해준다면 은혜는 사이보그 따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 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지구가 너무 많이 바뀌어야 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천 개의 파랑>, p. 97, 은혜의 시점)



'연재'는 로봇 제작에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형편상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몸이 망가져 방치되어 있는 '콜리'를 발견하고 직접 고쳐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삶의 격차라는 것이 어느 틈을 비집고 생기는 것인지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똑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부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아이들에게는 다가갈 수조차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우리 부모님도 돈을 벌고,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같은 나이에 이만큼 차이가 나는 걸까. 그 의문이 연재의 생각을 좀먹기 시작한 후 연재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조차 포기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다 접어도 가지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천 개의 파랑> p.113, 연재의 시점)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고 각자의 상처에 갇혀 살고 있는 세 모녀...

인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무리한 속도로 질주하느라 무릎 관절이 망가져 안락사될 위기에 놓인 경주마 '투데이'...

지친 '투데이'를 위해 스스로 몸을 내던졌다가 폐기 운명에 처한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

소설은 아픔과 외로움이 고인 정지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교감과 우정을 다룬다.    


'콜리'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태연하게 툭툭 던지는 질문들, 제3자의 시각으로 묘사하는 삶의 장면들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거나 한동안 잊어버린 혹은 잃고 살았던 본질을 건드린다.

그리움이란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고여 있는 시간을 흐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시간이 흘러 보경은 그곳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간은 그곳에서 1초도 흐르지 않았다. 보경이 매일 일찍 일어나 쉬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음을.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달리기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정적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수면 위에 돛을 펼치고 있었다.
“왜요?” 콜리가 물었다.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시간은 고여 있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가도 여지없이 그날로 빨려 들어갔다. 슬품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사실은 모두 멈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지구에 고여버린 시간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시간들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콜리가 보경을 향해 조금 더 몸을 틀었다.
“멈춘 상태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많은 힘이 필요하니까요. 당신이 말했던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과 같지 않을까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천 개의 파랑> p.285, 콜리와 보경의 대화)


콜리가 지냈던 그 집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고요했다. 세 명이서 사는 집이었지만 각 시간대별로 1인분의 소음만 발생하는 곳이었다. 함께 있지만 맞물리지 않는 각자의 시간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콜리는 그 침묵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금씩 균열이 생기며 서로에게 스며든 소움이 서로의 시간을 맞춰줄 거였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지 않도록 말이다.(<천 개의 파랑> p.346, 콜리가 바라본 연재 가족)


'콜리'는 인간과 동물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 행복해하는 순간, 존재 자체로 빛나는 순간을 알았다.



연재는 무언가에 열중할 때 빛나는 인간이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빛으로 발산되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열을 감지할 수 있는 콜리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연재는 콜리의 몸을 수리할 때 자주 빛을 뿜었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열중하며 콜리의 다리를 만지던 순간과 그릇에 담아 온 씨리얼을 퍼먹으며 어느 부분이 잘못 연결되어 있는지 도면을 살펴볼 때에도 빛이 나왔다. 지금도 연재의 몸에서는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천 개의 파랑> p.300)


투데이는 달릴 때 행복한 아이다. 태어나서 줄곧 주로를 달리는 것밖에 하지 못한 말은 결국 달림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 동안 마방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관절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주로를 달리는 것이 투데이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천 개의 파랑> p.308)



그리고 조곤조곤 토닥인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느리지만 하루 하루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멈춘 시간이 천천히 흐를 거라고...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고...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천 개의 파랑> p.347)
"괜찮아요. 신경쓰지 말아요. 저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천 개의 파랑> p.347)




소설 <천 개의 파랑>이 창작가무극으로 공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저것 재지않고 무조건 예매했다.

('콜리' 배역에 <팬텀싱어4>에서 응원했던 펜타곤 진호씨가 캐스팅되었다니 더 놓칠 수 없었다는...)   


뮤지컬은 또 뮤지컬대로 감동의 도가니다.

평면으로 펼쳐 있던 활자들이 배우들의 목소리로 입체적으로 살아나 생생하게 귀에 꽂혔다.  

소설 지면에서 조곤조곤 밀려들던 감동들이 무대 위에서 선명한 이미지와 소리를 입고 한껏 부풀어 올랐고 꾹꾹 눌려 있던 감정들이 주책없이 터져나왔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콜리'를 만나서 잠시나마 즐겁고 행복했다. 


나를 소모하며 너무 숨가쁘게 달려왔다면 잠시 속도를 줄여보자.

슬픔과 그리움에 매몰되어 고여 있는 시간을 살고 있다면 천천히라도 흐르게 해보자.

조급하지 않게, 상처를 어루만지며 느긋하게~

살아있는 이 순간에 감사하며 작지만 빛나는 행복을 하나씩 쌓아나가야지 다짐해본다.


삶에 무뎌질 때나 슬픔이 누적되어갈 때

마음 속에 저장해둔 '콜리'를 꺼내어

파랑파랑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봐야겠다.

나의 삶에 찬란함이 조금씩 스며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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