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름을 기억함에 대해...

by 푸른새벽



요즘 나는 ‘식물 이름 하나 기억하기’를 매일 실천 중이다. 한 달 전부터 아침마다 운동 삼아 안양천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새로운 식물 이름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내게 무명의 존재였던 낯선 식물들을 이름과 함께 마음속에 하나둘 저장하고 있다.



한번은 진한 갈색 원형 자수에 샛노란 레이스로 둘러쳐 있는 듯한 꽃이 눈에 띄었다. 꼬마 해바라기 같기도 해서 찾아봤더니 ‘기생(妓生)초’란다. 기생들이 쓰고 다녔던 ‘전모(氈帽)’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어떤 날은 가느다란 선들이 조밀하게 뻗은 ‘그린라이트’라는 억새를, 또 어떤 날은 길쭉한 꽃대에 보랏빛 구슬이 촘촘히 붙어 있는 ‘맥문동’을, 어느 날은 수직으로 솟은 꽃차례가 호랑이 꼬리 모양을 닮았다는 ‘꽃범의꼬리’를 만났다.


이름도 개성도 가지각색이거늘 ‘꽃이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태도로 고유성을 덮어버렸던 그간의 매정함을 돌아보게 된다.




이름을 알고 나니 뭉뚱그려진 채 무심히 스치던 세상 풍경들이 더욱 촘촘하고 선명한 해상도로 마음에 와닿는다. 산책하는 동안 양옆을 겉돌며 흘러가던 장면들도 어느새 조금씩 흡수되기 시작한다. 몰랐던 대상과 안면을 트면 예전보다 더 크고 구체적인 세상이 내 안에 들어온다. 이름을 기억해서 부르는 것은 그 대상이 하나의 의미로 각인되는 과정이다. 내가 먼저 이름을 발견하고 불러주는 다정함을 일상화해야겠다.


keyword
이전 03화지속성에 대한 불확신이 꿈틀거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