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집에 가면 엄마가 애지중지 가꾸는 정원 한편에 다육식물 전용 하우스가 있다. 다육식물 사랑이 넘치는 엄마가 오래전부터 키우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모양도 색도 크기도 다양하지만 이름을 알 리 없는 나는 그저 ‘이 다육이’, ‘저 다육이’로 통칭하거나 ‘얘’, ‘쟤’ 정도로 얼버무릴 뿐이다.
한번은 보라색 보석 모양 잎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와 손가락으로 콕 짚어 물었다.
“엄마, 얘는 이름이 뭐야?”
“아메치스. ‘자수정’이라는 뜻이래.”
“저건? 꼭 미니 청포도처럼 생겼네.”
“그래서 청옥이라고 해.”
음.... 내가 불러주지 못했을 뿐 저마다 예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구나. 나에게는 ‘무명(無名)’의 존재였던 것들이 엄마에게는 하나하나 선명한 이름으로 새겨져 있었다. 무지하고 무심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덩어리 혹은 집체로만 다가오던 대상이 남다른 애정을 쏟는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현미경 시점으로 전환되어 보인다. 덩어리가 아닌 낱낱에, 집체가 아닌 개체에 집중하고, 하나하나에 살뜰하게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애정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이름을 일일이 찾아보고 마음에 저장해두었다가 직접 불러주는 행위는 그만큼 공을 들이고 소중히 대한다는 의미니까.
요즘 나는 ‘식물 이름 하나 기억하기’를 매일 실천 중이다. 한 달 전부터 아침마다 운동 삼아 안양천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새로운 식물 이름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내게 무명의 존재였던 낯선 식물들을 이름과 함께 마음속에 하나둘 저장하고 있다.
한번은 진한 갈색 원형 자수에 샛노란 레이스로 둘러쳐 있는 듯한 꽃이 눈에 띄었다. 꼬마 해바라기 같기도 해서 찾아봤더니 ‘기생(妓生)초’란다. 기생들이 쓰고 다녔던 ‘전모(氈帽)’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어떤 날은 가느다란 선들이 조밀하게 뻗은 ‘그린라이트’라는 억새를, 또 어떤 날은 길쭉한 꽃대에 보랏빛 구슬이 촘촘히 붙어 있는 ‘맥문동’을, 어느 날은 수직으로 솟은 꽃차례가 호랑이 꼬리 모양을 닮았다는 ‘꽃범의꼬리’를 만났다.
이름도 개성도 가지각색이거늘 ‘꽃이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태도로 고유성을 덮어버렸던 그간의 매정함을 돌아보게 된다.
이름을 알고 나니 뭉뚱그려진 채 무심히 스치던 세상 풍경들이 더욱 촘촘하고 선명한 해상도로 마음에 와닿는다. 산책하는 동안 양옆을 겉돌며 흘러가던 장면들도 어느새 조금씩 흡수되기 시작한다. 몰랐던 대상과 안면을 트면 예전보다 더 크고 구체적인 세상이 내 안에 들어온다. 이름을 기억해서 부르는 것은 그 대상이 하나의 의미로 각인되는 과정이다. 내가 먼저 이름을 발견하고 불러주는 다정함을 일상화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