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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Dec 26. 2024

한눈파는 재미


해질 무렵 남편과 산책하러 나간 길, 공원 운동 기구들을 순회하듯 한번씩 해보는 중이었다. 일명 “거꾸리”에 몸을 붙여 매달려 있다가 바로 돌아온 남편이 내게도 해보란다. 질색팔색 안 한다고 내뺐지만 잡아줄 테니 천천히 해보라는 유혹에 어느새 등을 밀착시켜 준비 자세를 마친 나 자신. 이게 뭐라고 긴장까지 하며 세상 호들갑스럽게 몸을 서서히 넘기는데, 뒤집히는 찰나 눈앞을 훑어간 주홍빛 하늘이 아찔한 마음을 잠재웠다. 뒤로 젖혀짐과 동시에 부채꼴 모양으로 늘어지는 하늘, 그리고 발치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평소 가시 거리에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40대 중턱을 넘어 50대로 향해가는 나이… 코로나 시국을 중국에서 보내고 2023년 귀국한 후 다행히 학교로 복귀는 했으나 번역 일은 거의 반 토막이었다. AI의 잠식이니 중한 관계 이슈니 하며 시장 자체는 좁아졌는데 인력은 넘쳐나서 원하는 분야와 가격 적정선으로 추리다 보면 일의 양이 확 줄어들었다. 임용 기회에 대비해 틈틈이 논문을 발표하던 연구 의지도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우직하게 가다 보면 정착하겠지 기대하며 달려왔지만 막상 마주한 건 확연히 좁아지는 길 뿐이었다. 오랜 여정의 지속 가능성에 자꾸 물음표를 던지며 갈피를 못 잡던 중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 찰나의 순간, 덩어리진 소란스러운 마음들이 누군가 흔들어 재끼기라도 한 것처럼 흩어졌다. 운동 기구 하나에 감정 전개가 너무 억지스럽지 않나 싶겠지만 180도로 휘어지며 눈앞을 스쳤던 그 날의 하늘은 분명 내게 유난히도 강렬했다. 쌓이고 쌓였던 감정의 체기에 작은 숨통을 내어 주었달까. ‘너무 한 면만 보고 내달렸나?’ 




그래서 요즘 나는 ‘한눈 팔기’를 기꺼이 즐긴다. ‘딴 생각’도 하고, 시선이 닿지 않았던 곳도 돌아보고, 옆길로 살짝 새보기도 한다. ‘나와는 결이 달라서’, ‘그쪽으로는 재능이 없어서’, ‘어차피 못할 게 뻔해서’… 핑계와 편견으로 지레 철벽을 쳤던 다른 세계에도 기웃거려본다. 시간의 체감 속도가 빨라져서 인지, 나잇살이 붙으면서 배짱도 함께 들러붙어서인지, 요즘은 “나도 한번 해볼까” 하고 경계를 거두는 일이 한결 수월하다. 이렇게 마음먹었어도 워낙 일을 크게 저지르는 성정은 못되어서, 신중함을 가장한 주저함이 기본값으로 배어 있어서… 남들 눈에는 그게 무슨 도전인가 싶을 정도로 미약할 수도 있다. 


‘도전’이라고 해서 꼭 획기적인 변화로 나를 억지로 밀어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능한 선에서, 스스로 흡족한 선에서 나름의 일탈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신선하지 않을까? 이렇게 시작된 것이 이름하여 ‘소소하지만 “경이”로운 도전 프로젝트’다.  




의지가 약해질세라 바로 실행에 옮긴 것 중 하나가 ‘커피 공부하기’다. 커피는 내게 “이제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자 업무 의지를 끌어 모으는 오프닝 의식이다. 거실의 작업 책상으로 출근할 때도, 교실로 출강을 갈 때도 내 손에는 늘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들려 있다. 대단한 일가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습관처럼 손이 가고, 없으면 허전한 걸 보면 꽤나 애틋한 존재다. 좋아하니 좀더 알고 싶었고, 구체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다채롭게 즐기고 싶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야지 하던 막연한 마음을 내친 김에 당장 꺼내 보기로 했다. 


홍대에 있는 바리스타 학원을 찾아갔다. 바리스타 자격증 하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루는 기본 바리스타 스킬부터 브루잉, 로스팅, 라뗴아트까지 단계별로 수업과 자격증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그저 커피의 세계가 궁금해 찾아간 거라 평소 배우고 싶었던 기본 바리스타 과정과 브루잉 기초 과정만 듣기로 했다. 새로운 배움 앞에서 나는 서먹함과 서투름의 연속이었다. 




포터필터, 도징, 라벨링, 탬핑… 생소한 용어들이 쏟아졌고, 장비와 도구들도 낯설었다. ‘신 맛’과 ‘고소한 맛’ 원두 정도나 알았던 내게 산지별로, 농장별로, 건조 방식이나 로스팅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린다는 원두 센서리의 세계는 아득하고 심오했다.



 ‘커피에서 말린 자두향이 난다’, ‘자몽향이 느껴진다’, ‘블루베리향이 섞여 있다’고 하지만 나의 둔한 혀끝과 코끝에서는 향미가 확실히 와닿지 않았다. 하트 모양이 나와야 하는 라떼 아트에서는 두루뭉술한 동그라미가 최선이었다. 어쩜 손끝마저 한결같이 무디고 둔한 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들으러 나서는 마음은 늘 가볍고 즐거웠다. 조금 뚝딱거리면 어떤가. 난 이미 커피를 배우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니 그걸로 족하다. 

커피숍에 가서 나의 커피 취향을 설명할 줄 알게 되었으며,

무심코 흘려봤던 바리스타의 동작 하나하나, 커피 도구 하나하나에 전문 용어를 얹어낼 줄도 안다. 

커피 원두를 고를 때면 산지나 밸런스, 로스팅 방식까지 신중히 살피게 되었고,

호로록 들이켜고 말던 커피를 입에 잠시 머금은 채 바디감과 맛을 음미하는 여유도 챙긴다. 




‘딴짓’을 벌이니 주변 세상이 더 넓게, 더 깊이 다가온다. 소심한 변화여도 고였던 삶에 찰랑찰랑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면, 견고했던 마음이 들썩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도전이다. ‘한눈 팔기’ 덕분에 틈새를 벌려 들고나는 요즘의 새로운 감정들이 참 귀하다. 단조롭고 정체된 일상의 한 켠을 생소한 감정들에 흔쾌히 내어 주고, 다양한 각도의 세상을 즐기며 좀더 재미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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