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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Sep 02. 2024

조용하게나마 ‘덕질’도 해봅니다


내향형에 가까운 나는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데 오래 걸리는 편이다. 정해진 틀을 벗어나는 게 불편했고, 무난하면서 익숙한 일상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하고 싶은 일을 이어가며 잔잔하고 무탈하게 지나온 세월에 감사하지만, 마흔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도달하고 보니 문득 마음 한구석이 공허하고 소란스러웠다. ‘공허함’과 ‘소란함’이라는 모순된 감정이 갈마드는 건 아마도 하나에 꽂히면 옆길로 좀처럼 새지 않는 외골수 기질과 주변 사람들에게 적당히 맞추기는 해도 선뜻 곁까지 내주지 못하는 미지근한 관계성 때문일 터다. 


진득하게 매진해 온 내 일의 현재는 생각보다 보잘것없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관계들은 결국 서먹함을 이기지 못하고 유효기간이 지난 듯 자연스레 폐기되었다.  낯선 길이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감에 있어서 늘 ‘이성’과 ‘신중함’을 방패막이로 삼았던 것 같다. 사실 그 뒤에는 우유부단함과 두려움이 숨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언젠가 <뜨거운 싱어즈>라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중장년 배우들이 합창단을 결성하고 실제 공연 준비를 하는 내용이었는데, 연기로는 이미 입지가 탄탄한 배우들이 ‘합창 무대’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첫 번째 오디션에서 배우 김영옥 님과 나문희 님이 가사 하나하나에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리듯 노래하는 장면은 뭉클함 그 자체였다. 고령에 낯선 도전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전에 없던 시도가 필요한 순간마다 늘 꽁무니를 빼온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이제는 나도 경직된 마음가짐을 조금씩 풀어보려고 한다. 어느 순간 덩그러니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마주하고부터 자의적으로 그어놓았던 심리적 방어선을 허물어보고 싶어졌다. 시간의 체감 속도가 빨라져서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하루하루를 좀 더 의미 있게, 그리고 이왕이면 새로운 감정과 경험들로 채우고 싶은 욕구가 조금씩 솟아오른다. 


‘나와는 결이 달라서’, ‘그쪽으로는 재능이 없어서’, ‘어차피 못할 게 뻔해서’ 등. 핑계와 편견으로 지레 철벽을 쳤던 또 다른 세계에 다가서려 한다. 아마 이렇게 마음 먹었어도 워낙 일을 크게 저지르거나 대담하게 일탈하는 성정은 못되어서 그 도전의 정도가 남들 눈에는 미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게 의미 있는 도전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소심할지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조곤조곤하게 새로운 감정과 경험을 맞이해나가고 싶다. 일단 마음이 동하는 방향으로 몸을 이끌고 가서 한번 기웃거려보자고 경계를 거두니 재미있어 보이는 게 많아졌다.     





요즘은 ‘팬심’이라는 서툴지만 풋풋한 감정에 조금씩 젖어 드는 중이다. 연예인 팬덤은 그저 남들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무언가에 과하게 몰입하고 빠져드는 것을 통제하는 경향이 강했다. 학창 시절 10대들을 뒤흔들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무대를 보면서도 별 감흥 없이 꼿꼿했고, 드라마 속 남자 배우의 캐릭터에 잠시 설렜다가도 실제 배우에 대한 팬심으로 발전한 적은 없었다. 그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팬카페라는 곳에 가입했다. ‘입덕’의 문턱으로 끌어들인 건 ‘크레즐’이라는 크로스오버 그룹이다. 


<팬텀싱어 4>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돌 메인보컬, 뮤지컬 배우, 국악인, 성악가 4인으로 결성된 팀이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해 온 멤버들이라 각자의 색이 너무 돌출되어 과연 잘 어우러질지 물음표를 띄웠다. 그런데 초반의 의구심은 금세 사라졌다. 각자의 주 종목에서 이미 인정받고 있는 실력자들이지만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 서로의 분야를 흡수하고 배우며 본연의 영역을 더욱 확장해 나가는 모습, 멤버 하나하나의 색을 돋보이게 받쳐주면서 조화롭게 섞이는 모습, 무엇보다 진심으로 음악을 즐기는 모습들이 오롯이 와닿았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성장 서사에 서서히 스며들었고, 어느새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마음에 배어든 이 팀이 올해 본격적으로 앨범을 발매해 활동을 시작했다. 게다가 수록곡들이 하나같이 취향 저격이었다. 올여름, 내 하루의 인트로를 장식하는 고정 플레이리스트로 반복 재생 중이다. 매일 팬카페를 들락거리며 서성대고, 멤버들의 새로운 활동 영상이 없는지 검색질도 거르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팬콘서트에도 다녀왔다. 





현장에서 직관하며 듣는 노래는 화면 너머로 흘러나오던 편집된 버전의 노래와 차원이 달랐다. 슬로건을 흔들며 몰입하는 내 모습에 딸아이가 말하길 이 정도면 부정할 수 없는 ‘입덕’이 맞단다. 


첫공부터 막공까지 ‘올콘’하고 지역 행사 일정도 놓치지 않고 함께 하는 열정 ‘덕후’들에는 명함도 못 내밀겠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사실 콘서트 현장에 직접 가보고 싶은 뮤지션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변화다. 조용하고 잔잔하게 내 방식대로 즐기는 ‘덕질’도 이미 충분히 신기하고 신선하다. 때로는 콘서트 현장에서, 때로는 영상의 화면 너머로, 때로는 먼발치에서나마 응원을 보내는 것, 그들의 음악을 일상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며 그 안에서 위안받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도전’이라고 해서 꼭 극단적이고 획기적인 변화로 나를 억지로 밀어 넣을 필요는 없다. 소심하고 소소한 변화여도 고였던 삶에 찰랑찰랑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면, 견고했던 마음이 들썩이며 말랑해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설레고 값지지 않을까. 아주 작은 시작일지언정 미지의 영역으로 ‘첫발’을 떼는 순간의 감정과 경험들이 차곡차곡 포개지며 좀 더 너그럽고 여유로운 중년을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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